스템은 책상 위에 코인 하나를 올려놓았다. 금화였다. 이 금화는 모양이 무척 단순했으며 코인 안에 ‘복(福)’자가 새겨져 있었다.

“미스터 서, 이 금화가 어느 나라에서 발행된 것이라고 보이나?”

“일본에서 발행된 거네요...”

“그걸 어떻게 알지?”

“이 복(福)자의 자모를 보면 알 수 있죠. 중국이나 싱가포르에서 발행되었다면 필기체 복자를 새겼을 겁니다”

스템 대위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화를 집어 이수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수는 손바닥에 놓인 금화를 한참 들여다보자 갖가지 환영의 단편들이 머릿속을 훑어지나갔다. 하지만 ‘대체 스템 대위가 왜 내게 이 금화를 보여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생각이 멈추자, 지금 스템은 이수로부터 뭔가 숨겨진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일본이 주조해 마닐라로 공수한 순금코인 마루후쿠.....사진=위키피디아]

“미스터 서, 이 금화는 필리핀에서 온 거야... 지난 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미군과 일본군사이에 혹독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자 인질을 방패로 삼아 버티다가 나중에 인질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어... 그 인질들 가운데 마닐라에 사는 화교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목숨을 살려주면 금화를 주겠다고 하면서 일본군에게 이 금화를 줬다는 거야”

“일본에서 발행된 금화가 어떻게 화교들 손안에 들어갔죠?”

“그게 바로 우리가 밝혀내야 하는 일이야!... 제 14방면군의 야마시타 사령관의 제안으로 이 금화를 일본 본국에서 주조해 필리핀에 공수했다는 정보는 알아냈지만, 이 금화를 발행한 특수한 목적을 캐내지 못하고 있어”

“군수품 조달을 위해서가 아닐까요?”

“군수품 조달을 위해서라면 군표(軍票)를 발행하거나 바나나 노트(Banana Note)를 지급하면 되었겠지.... 아, 근데 미스터 서, 바나나 노트가 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야마시타 사령관이 싱가포르를 지배하면서 발행한 10달러짜리 지폐를 말하는 거죠?”

순간, 이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꼬리’를 흔들다가 올가미에 꼬리를 잡힌 것 같은 예감이 엄습했다. 이수가 바나나 노트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을 때 스템 대위의 동공이 일시적으로 커지는 걸 감지해서다. 이 능수의 정보장교 앞에서 아무 얘기나 끄집어냈다가는 언제 올가미에 낚아 채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바나나 노트를 알고 있는 까닭을 설명하지 않을 순 없었다.

“제가 일본군에 징용당해 있을 때 우리 징용자들을 관할하는 이치카와 중대장이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을 항복시킨 야마시타 장군 산하의 헌병이었는데 그가 바나나 노트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스템 대위는 여기서 질문을 멈추더니, 얘기의 방향을 돌렸다.

“이 금화를 내가 직접 감정해봤는데 직경 30.5mm에 무게 31.0g이고, 순도가 24K로 완벽한 순금화폐야...일본에선 마루후쿠(丸福)라고 부른다는데.... 근데, 야마시타 사령관은 도대체 이 금화를 어디에다 썼을까?”

그제야 이수는 얽힌 실타래를 풀어낼 끄나풀을 찾아냈다. 스템 대위는 ‘자마미 보석동굴’의 존재를 첩보를 통해 들은 뒤 이를 탐색하기 위해 이수를 커다란 그물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당겨보는 중이라는 걸 감지했다.

오싹했다. 그는 빨리 이 정보장교의 후각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했지만 그는 바깥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더 이상 질문할 게 없다는 듯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어,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네... 미스터 서, 같이 점심 먹으러 가지” 라며 벌떡 일어서서 장교 식당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그는 의도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른손으로 금화를 만지작거리다가 공중으로 금화를 던져 올렸다. 자마미의 파란 바다, 그 위의 짙푸른 하늘에서 금화 한 닢이 빤짝 빛을 내더니 다시 스템 대위의 손안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식사시간이 지난 탓에 식당 안은 썰렁했다. 스템 대위는 일단 맥주 2병을 주문하더니 다시 금화를 식탁 위에 “딱!” 소리나게 올려놓았다.

“미스터 서, 우리가 이 금화의 비밀을 함께 풀어보도록 하는 게 어때?”

이수는 대답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스템은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이수에게 한 병을 건네준 뒤 단번에 맥주 한 병을 주룩 다 비웠다.

“미스터 서, 아까 얘기한 이치카와 중대장은 아직 살아있나?”

“아뇨, 지난 3월 26일 밤 교전에서 전사했습니다.”

“전사한 걸 직접 확인한 건가?”

“그럼요. 제가 묻어줬으니까요”

“그래?, 직접 묻어줄 정도라면 서로 무척 친했겠군?”

결국 이수는 질문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설정해놓은 늪은 벗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구조였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끝까지 침묵으로 버티다가 나뭇가지 하나라도 움켜잡을 수 있을 때 그걸 잡고 서서히 빠져나오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수는 말없이 버텼다.

지금까지 보석동굴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죽임을 당했으니까 이수는 자신이 확인했던 내용을 완전히 부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이수가 더 이상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스템은 자신이 아는 내용을 먼저 털어놓았다.

제 14방면군 야마시타 사령관이 싱가포르에서 모은 금괴와 보석 및 진귀품을 필리핀으로 이송해왔는데 금괴는 필리핀어딘가에 매장했지만, 보석과 역사적 가치를 지닌 진귀품은 천황에게 받치기 위해 빼돌렸다고 했다.
근데 천황에게 아무런 근거 없이 이 보석과 진귀품을 바치면 천황으로부터 탈취품으로 의심을 받을까봐 이 ‘마루후쿠’를 발행해 필리핀 화교들에게 금화를 주고 진귀품과 교환했다고 설명하기 위해 이 금전을 발행한 걸로 추정된다고 얘기했다. 다시 말해 이 금화는 보석과 진귀품을 ‘세탁’하기 위해 발행했다는 거였다. 발행한 금전은 적어도 1만매가 넘고 이 금전으로 교환한 보석의 가치는 작은 국가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한 거라고 덧붙였다.

“참으로 묘한 건 이 금화는 여기저기서 발견이 되는데 이걸로 교환한 보석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거야.....우리는 그 진귀품을 숨겨둔 곳을 ‘C-10’으로 명명하고 C-10의 소재지를 찾고 있지...우리가 추적한 정보에 의하면 C-10은 자마미, 아카, 도카시키 이 3개 섬 가운데 하나일거라고 추정하고 있어”

이수는 미국 제10군 정보기관(CACI 10th Army)이 얼마나 치밀한지 뜨끔했다. 이런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어떻게 이처럼 정확한 정보를 추적했을까? 하지만 이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내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미스터 서, 내가 지금 털어놓은 얘기는 니미츠 사령관도 모르는 사실이야...오직 맥아더 사령관과 윌리엄 마쿼트(W.Marquat) 소장만 알고 있지...그러니까, 자네가 C-10이 어디에 있는지 빠른 시간 안에 밝혀내주길 바래...”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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