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버팀 일행은 고개중턱에 올라서서 아래쪽 아사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적황색 기와집들은 다 부서졌고, 외곽의 한 채만 반파되어 지붕 속의 서까래가 검게 삐죽삐죽 솟아 나왔다. 이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이는 것들 가운데 본래 모습을 지닌 건 아고노우라 만(灣)의 파란 물빛 뿐.

라쿠스이 벙커는 아래로 보이는 마을 뒤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타는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부상당한 주민들을 간호하러 이 벙커에 들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름길을 잘 알았다.

하지만 지름길은 험난했다. 미군의 과다한 폭격 때문에 숯이 된 채 서있는 기괴한 나무기둥들을 손으로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걸어왔지만 라쿠스이 벙커 가까이 도착했을 땐 세이버팀 다섯 사람의 얼굴은 어느새 모두 검은 숯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벙커 바로 앞에 다다르자 우타는 이번에도 자기 혼자 벙커 안으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지금 위안부들은 마음이 너무나 착잡한 상태여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겁니다. 일본군이 아카사치산으로 후퇴하기 전에 위안부 한 사람당 수류탄 한 개씩을 나눠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우리가 투항을 강요하면 모두 수류탄으로 자살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우타, 당신 혼자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이 분들은 지금 남자들에게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으니까, 저 혼자 들어간 뒤 15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그때 들어오세요.”

“좋아, 15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으면, 안에 일본군이 있다는 걸로 판단할게.”

이수는 미군 3명에게 우타가 얘기한 상황을 설명했다. 미군 세 사람은 아직도 산업조합 벙커의 집단자결 현장을 본 충격에 벗어나지 못했는지, 이수의 설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불타버린 류큐마쓰 나무기둥을 등지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수는 벙커와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아있는 테일러 하사 옆으로 가서 엉덩이를 부딪치며 앉았다. 지금까지 그토록 침착하던 테일러 하사도 아까 벙커에서 본 참극엔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쑤욱 내민 채 말이 없었다.

“테일러, 당신 결혼했어요?”

“그럼, 세 살 된 딸도 있어...”

한참동안 눈을 껌벅이던 테일러는 이 태평양전선에서 적군이든 아군이든 군인이 죽은 건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끔찍하게 죽은 걸 보는 건 처음이어서 너무 충격적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윗도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이수에게 내보였다. 사진엔 그의 딸이 맑은 눈빛으로 아빠를 말끔히 쳐다보았다. 이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해맑은 표정’은  전쟁, 권력, 돈, 폭력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딸의 얼굴을 못 본지 오래 됐겠네요.”

“11개월이 되었지.....”

“이제 곧 딸을 보게 되겠죠...일본이 항복할 테니까요”

“항복?......미스터 서, 일본군은 모두가 항복하기 보단 자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쉽게 항복하겠어?...오키나와 본도에 지금 10만 명의 일본군이 있다고 하거든...일본군은 몸에 폭탄을 안고 죽으니까, 십만 개의 움직이는 폭탄이 있는 셈이야. 물론 우리 미군이 이기긴 하겠지만, 두고봐...엄청난 희생이 따를 거야”

“맞아요...여기 와서 보니 일본군들은 죽기 위해 전쟁을 하고, 미군은 살기 위해 전쟁을 하더라구요...하지만 테일러, 우리는 ‘살리기’ 위해 전쟁을 합시다.”

“좋아, 근데, 미스터 서, 지금 저 벙커 안에 일본군이 분명히 있겠지?”

“그럴 가능성이 커요. 15분 안에 우타가 나오지 않으면 일본군이 있는 게 틀림없죠.”

“이미 15분이 지났는데?”

“어?, 정말 15분이 지났네요....자, 테일러, 내가 먼저 벙커로 들어갈게요. 20초가 지나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 안에 일본군이 있는 걸로 판단하고 전투태세로 들어오세요.”

이수는 떨리는 다리를 소리 나지 않게 움직이며 허리를 굽히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내부를 자세히 살펴봤다. 희미한 촛불 한 개가 비추는 동굴 안에는 위안부로 보이는 6명의 여자들이 둥글게 앉아있고, 그들 사이에 한 여자가 드러누워 있는데 그 여자는 부상을 당했는지 우타가 열심히 발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그 옆에는 특공정 소년병 2명이 서서 여자들을 감시했다. 우타가 붕대를 다 감은 뒤 누워있던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자, 이제 모두 나갑시다. 여기서 굶어죽지 말고...수용소로 가서 목욕한 뒤 옷 갈아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읍시다.”

그러자 소년병 중 한명이 소총을 집어 들더니 우타에게 총을 겨누었다. 소년병은 2명이었지만 총은 한 자루 밖에 없고, 다른 한명은 수류탄 2개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해상정진대원들이 아카사치산으로 후퇴하면서 위안부들이 탈출하면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날까 봐 소년병 2명에게 그녀들을 감시하도록 해놓은 거였다.

“움직이지 마. 여기서 나가면 안 돼. 당신들이 여기를 떠나면 우리는 총살당해. 절대 보내줄 수 없어”

“엔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오가와도 이미 미군에 항복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쉬고 있는 중이야.”

이때 위안부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소년병을 쏘아보더니 찢어지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야아!...그래 쏘려면 나부터 쏴봐라! 그렇잖아도, 고향에 갈 수도 없으니, 여기서 죽고 싶은데 잘됐다. 빨리 쏴, 이놈아!...”

그녀가 일어서서 가슴을 내밀며 고함치자 소년병은 그 여자에게 총을 겨누다가 총구를 돌리더니 동굴 천장에다 실탄 한발을 쏘았다. 총소리가 동굴 안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수는 얼른 바지주머니에 든 권총을 꺼내 소년병 뒤로 가서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총소리가 나자 3명의 미군이 빠르게 접근해 들어와 자동소총으로 벙커 천장을 향해 드르륵 갈겼다. 그러자 모든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고, 소년병들도 주저앉았다.

어시지 상병과 베닛 상병이 각각 소년병 한 명씩을 쓰러뜨려 발로 어깨를 짓누르며 순식간에 제압했다. 동굴안의 먼지가 가라앉자 우타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자, 이제 여자 분들부터 먼저 밖으로 나갑시다.”

우타는 먼저 발목 부상을 입은 여자를 어깨로 부축해서 동굴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시지는 특공대원의 총을 압수하고 들고 있던 수류탄 2개도 빼앗았다. 베닛은 2명의 소년병들을 양손 들게 한 뒤 밖으로 끌어냈다. 밖으로 나와서 보니 두 소년병은 오가와의 친구인 사사키와 엔도였다.

밖으로 나오자 테일러 하사가 이수를 쳐다보며 소년 특공대원들에게 지금 항복을 하지 않으면 즉시 사살하겠다고 얘기하라고 했다.

“자, 자네들, 이 지휘관님 말씀이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여기서 즉시 사살하겠다고 한다. 항복을 하면 수용소로 가서 이발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희 마음대로다...엔도!, 사사키! 어떻게 할 텐가?”

엔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저 미군 3명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뒤, 사사키의 눈치를 살폈다. 두 소년병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엔도가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항복하겠습니다...”

특공대원들을 항복시키는 사이 우타는 여자들을 데리고 산골짜기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수는 우타의 돌발행동에 놀라서 소리쳤다.

“우타!, 어디가?”

“아, 네, 바로 위에 라쿠스이 샘터가 있거든요. 저기서 다들 세수 좀 하고 갈게요”
이수와 미군과 소년병들은 하는 수 없이 우타와 7명의 여자들이 움직이는 쪽으로 따라갔는데 그곳엔 그야말로 바위틈새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그 아래엔 맑은 물이 가득 찬 웅덩이가 하나 나타났다. 폐허가 된 이 전쟁터에 신기하게도 웅덩이 하나만 오롯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일곱 명의 여자들이 차례로 물을 마시자 우타가 가방 속에서 초콜릿을 꺼내 한 사람에게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초콜릿은 역시 마약 같았다. 초콜릿을 먹고 난 여자들은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며칠 째 세수를 하지 못해 회색 먼지를 뒤집어 쓴 얼굴과 머리에 서로 물을 퍼부어주더니 물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타는 발목 부상을 당해 물웅덩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여자에게 초콜릿을 건네주고, 수건에 물을 묻혀왔다. 발목을 세게 삐어 걷지 못하는 여자는 그들 가운데 가장 어린 것 같았다. 다들 20세 가까이 되어 보이는데 그녀만 열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우타가 그녀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다듬어주자, 어느새 '해맑은 표정'이 빛나듯 드러났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