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이수와 우타는 수송선 LST-829에 있는 행정본부를 다녀온 스템 대위를 찾아갔다. 스템 대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겼다.

그는 오늘 아침 장교회의에서 서이수와 서우타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미군 군속으로 임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임명장과 임시신분증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고 악수를 청했다.

“미스터 서는 앞으로 미군과 같은 수준의 예우를 받으면서 행정업무를 지원하게 되고, 미시즈 서는 자마미섬 포로수용소의 의무반에서 주민과 포로들 가운데 부상자와 병약자를 간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어.”

우타는 미군을 간호하는 임무가 주어질까봐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자마미수용소에서 주민들의 간호업무를 맡게 되자 이수의 팔을 꼭 껴안으며 뛰다시피 기뻐했다.

“미스터 서, 부인의 표정을 보니까...업무분담을 잘 한 것 같은데?” “네, 무척 만족해하네요.”

“자, 그러면 일단 미시즈 서는 자마미수용소 의무반에 가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미스터 서는 오전 중에 번역 업무를 좀 해줘요.”

“예, 대위님, 제가 번역 업무는 빨리 끝내겠습니다. 하지만 대위님, 요청사항이 하나 있습니다......지금 저 자마미섬 산속에 주민, 조선인 군부, 특공정 소년병들이 수백 명이나 숨어있는데 이들은 자살하거나 굶어 죽을 형편에 처해있습니다. 이미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비참하게 자살을 했고, 일본군 패잔병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으며, 도망병을 잡아서 현장에서 사살하고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를 자마미 산속에 투입해주시면 그들을 온힘을 다해 설득해 미군에 투항하도록 하겠습니다...상황이 아주 급박합니다.”

“알았네. 그렇지 않아도 여러 병사들이 주민들을 투항시키기 위한 직접적인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더군...사실, 지금 해달라는 번역 업무도 자마미, 아카, 도카시키 3개 섬에 있는 주민과 군인들을 설득하는 전단지를 제작하기 위한 거야” “아,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이미 302중대에서 베테랑 전투병 3명을 조직해놨으니 자마미 지리를 잘 아는 부인을 동반해서 설득작업에 나서도록 해보게.”

우타가 수용소 의무반으로 떠나자, 이수는 스템 대위와 함께 LST에 있는 행정본부로 가서 대위가 건네주는 자료들을 살펴봤다. 이수가 번역해야 할 것은 미군의 선전지(삐라)로 비행기에서 자마미 아키 게루마 도카시키 등 4개 섬에 뿌리기 위한 것이었다.

스템 대위는 선전지와 함께 참고자료와 사진도 보여주었다. 참고자료와 사진을 살펴보다가 이수는 몹시 놀랐다. 미군이 자마미섬에 상륙하기 16일 전인 3월 10일 미군이 도쿄를 대규모로 공습해서 도쿄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쿄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거였다.

이수는 상태를 금방 이해할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해 10월 10일 나하에 소이탄이 떨어져 1만 채의 가옥이 불타는 걸 가잔비라 언덕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미군기가 도쿄에 수만 발의 소이탄을 투하했다면 나무집과 종이창문으로 된 도쿄 시내는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도쿄대의 이치카와 히데오 교수가 생각이 났다. 이치카와 중대장을 통해 이수가 도쿄로 빨리 돌아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오히려 이치카와 히데오 교수가 더 위험한 국면에 처하지 않았는지 걱정됐다.

미군이 이미 작성해놓은 선전지는 이처럼 도쿄와 태평양에서 계속 승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곧 항복할 거니까 주민들도 빨리 투항하는 게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수는 스템 대위에게 게라마열도에 있는 주민들은 이미 미군이 일본군 보다 우세하다는 걸 눈으로 직접 봐온 터라 이 내용으로는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위님, 지금 자마미에 있는 주민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면 여자는 강간하고, 남자는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는 일본군의 세뇌교육으로 인해 미군이 무서워서 투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대위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는 지난해 11월 18일 보도 선전 방첩 등에 관한 오키나와현민 지도 요강을 정하고, 일본군은 ‘군관민 공생 공사의 일체화’를 한다는 방침 아래에 군관민 일체의 총동원 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때문에 군인이 죽으면 주민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민들이 마음 놓고 투항하게 할까?”

“전단지 내용에 미군이 우세하다는 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먼저 투항한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편안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강조하지?”

“우리는 미군에 항복한 뒤 옷과 음식을 풍부하게 공급받고,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선전문 하단에 체험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음...그렇네...그거 좋은 방법이겠네...”

이수는 자기가 직접 체험한 내용을 가지고 잘 아는 상대를 설득하면 제 발로 찾아올 거란 확신을 가졌다.

먼저 미군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안전한지 체험해본 사람의 얘기를 아직 산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수는 수용자들을 찾아가 일일이 취재를 해서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적었다. 오후 늦게 선전지 작성을 끝내고 스템 대위에게 제출하자, 대위가 이수에게 제안했다.

“근데, 미스터 서, 자마미 주민과 코리언들의 생명을 구하려면...자네도 무장을 좀 해야 할 것 같은 데...” “저는 사람 죽이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저도 어니 파일 기자처럼 무장을 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니 파일이 저렇게 오래 살아남은 건 그가 유럽전쟁에 오랫동안 취재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 악랄한 독일군도 무장을 하지 않은 의무대원이나 종군기자나 주민들에게 죄 없이 총격을 가하거나 총살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들은 가장 보호해야 할 대상인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하고 있어. 자네도 여러 번 봤겠지만 주민들에게 아버지가 자기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도록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러니까, 총을 든 군인이 아닌 마을사람들까지 마구 살해하는 이 전쟁에서 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건 만용이야. 권총을 지급토록 할 테니 무장을 하게. 그 까닭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들과 자네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야” “예, 그럼 권총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서, 권총 쏠 줄은 아나?” “잘 쏘지는 못하지만 쏠 줄은 압니다.” “그럼, 나를 따라오게. 지금 권총 한 정을 지급해줄 테니까”

이수는 스템 대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를 따라 총기보급창으로 가서 권총 한 자루를 보급 받았다. 스템 대위는 그를 사격연습장으로 데려 갔다. 이 LST안에 사격연습장이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사격장에 들어서자 사병 2명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수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권총 쏘는 법을 배워서 잘 쏘는 편이었다. 아버지가 깊은 산에 약초를 캐러 갈 땐 산짐승들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꼭 권총을 휴대하고 다니셨다.
그 덕분에 이수는 소학교 상급학년일 때 산속에 들어가 아버지로부터 권총 쏘는 법을 익혔다. 그때 아버지는 앞으로 식물을 채집하려면 강원도나 함경도의 깊은 산속을 헤매야 하는데 총이 없으면 산짐승을 피하기 어렵고, 소총을 들고 다니면 남의 눈에 산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므로 권총을 꼭 휴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오늘 이수가 보급창에서 받은 권총은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던 일본의 26년식 리볼버 권총보다 길이는 조금 짧고 무게는 약간 더 무거웠다. 미국 콜트사가 제작한 M1911인데 손잡이 안에 총알을 밀어 올리는 방식의 탄창이 장착되어있었다. 총알 7발을 받아 장착한 뒤 손으로 잡아보니까 일본 권총보다 안정감 있게 잡혔다. 스템 대위는 7발을 다 쏴보라고 했다. 이수가 쏜 총알은 7발 모두 검은색 원 안에 명중했다.

“미스터 서,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식물학자가 장교인 나보다 총을 훨씬 더 잘 쏘잖아!”

“그럴 리가요. 당연히 대위님이 더 잘 쏘시겠죠...저는 깊은 산속에서 식물채집 할 때 맹수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연습을 좀 했습니다”

“다행이군, 자, 우리는 이제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전쟁을 치르러 가야할 차례이네. 10명을 죽이는 것보다 1명을 살리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지 않겠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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