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자코메티는 첨단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변하고 견인하는 철학적 사상과 조우하여,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하였다. 자코메티는 젊은 시절 유럽사회, 특히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전파된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아 조각가로서 명성과 명예를 얻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암울한 시대상을 표현한 조르주 바타유의 정신세계에 입문하였다. 그 당시 앙드레 브레통은 바타유의 노골적으로 성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유럽 지식인들에 어울리는 새로운 정신적인 운동을 주도하였다. 브레통은 자코메티를 초현실주의 운동을 조각으로 가장 이성적으로 표현할 유일한 인물로 판단하여 그를 자신의 동아리로 끌어들였다.

1938년 어느 날, 자코메티는 파리의 카페 플로르에서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 자코메티보다는 몇 살 어려보이는 볼품없고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는 보기에도 부담스런 돋보기 안경을 썼으며, 마주하면 어디를 보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시(斜視)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자코메티에게 몸을 돌려 말을 걸었다. “저는 당신을 이곳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카페에 오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을 보니, 당신과 나는 유사한 취미를 가진 사람 같습니다. 제가 오늘 지갑을 가져오지 않아 술값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시 돈 좀 내주실수 있습니까?”

자코메티는 1930년대 말, 바타유와 브레통을 대치하며 인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해줄 정신적인 안내자이자 친구인 사르트르를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는 전례가 없는 지식인들의 카페문화가 시작되었다.
바타유와 사르트르는 당시 파리 지식인들의 양 극단을 대표한다. 바타유는 스스로 철학을 배운 길거리 철학자였지만, 한때 사제가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신의 존재를 믿었다. 신을 버리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궁핍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귀족으로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극작가,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가 1945년에 주도해 발간하기 시작한 월간지 <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은 실존주의를 신봉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영화평론, 연극평론, 서평, 시류에 대한 논평을 싣는 지식의 최전선이었다. 그의 글쓰기와 강연은 파리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자코메티는 누구와도 친분을 쌓는 개방적인 사람이다. 그는 사르트르와 매주 만나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작품을 위한 철학적인 기반을 다졌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에게 정신적이며 지적인 멘토였다. 그들은 만나면 몇 시간이곤 다양한 주제에 관해 지적인 대화를 즐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시선 그리고 사상의 다양한 결들을 서로 인식하고 수용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르트르 자신도 초기에는 초현실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아 예술을 삶의 허무(虛無)에 대한 해답으로 여겼다. 예술은 진실과 대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당시 파리 지식인들의 구루인 초현실주의 철학자 브레통과 바타유를 타도해야했다.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의 부정적인 시각과 시대착오적이며 도피적인 신비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의 사상은 시대의 희로애락에 참여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다. 사르트르는 나치스 점령시절 레지스탕스로 활동하였고 전후 사회평등을 위해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모든 사람들의 전쟁이었으며, 나치스의 만행엔 저항만이 해답이었다. 사르트르의 주장은 전쟁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로 피신했던 자코메티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의 사회 참여적인 실존주의 사상이 브레통과 바타유의 도피적인 초현실주의 사상보다, 전후 프랑스 사회를 좀 더 잘 대변한다고 판단하였다. 사르트르와의 교류는 자코메티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장 폴 사르트르 / 1946년

자코메티는 사르트르를 1946년에 연필로 그렸다. 사르트르의 시선엔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생각이란 시선이다. 그의 얼굴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비호감이다. 사람들은 다름과 타인을 두려워한다. 사르트르는 다름과 타인성이 현대적인 삶의 핵심이라고 간파했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의 현실을 어떻게 이 순간에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저 멀리 보지 않는다. 또한 더 높이, 혹은 저 깊이 보지 않는다. 그는 이 그림에서 우리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는 인생을 찬양하거나 호기심으로만 관찰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두 눈으로 보는 것을,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믿지도 않는다.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의 생각을 그의 얼굴에 수많이 그려진 선으로 표현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색으로 책하지 않고 단순히 연필로만 소묘하였다. 그는 색을 칠하거나 조각을 할 정도로 인간스럽지 않다. 그는 오히려 영적이기 때문에, 연필로만 표현하였다. 사르트르의 존재는 선과 선 사이의 불투명한 공간에서 살아 숨을 쉰다. 그는 내면으로 향한 눈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꿈, 스핑크스, 그리고 T의 죽음>
아네트가 자코메티와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코메티의 삶과 예술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자코메티와 친구이자 폴란드 예술가였던 토니오 포토칭의 죽음이었다. 포토칭은 자코메티가 거주하고 일했던 다 쓰러져가는 미궁과 같은 건물의 관리인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포토칭은 간암으로 오랫동안 시달려, 그의 몸은 노란색이었고 퉁퉁 부었다. 자코메티와 아네트는 죽어가는 한 인간의 불평을 여러 달 동안 들어야 했다.

그는 사르트르를 통해 일상의 실제적인 대상을 생경하게 보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허무와 무의미성에 매료되었다. 그는 포토칭의 시신을 목격하면서 가슴 속 깊이 묻혀 있던 공포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그를 한동안 끔찍한 꿈으로 괴롭혔다. 자코메티는 이 경험을 1946년 12월 <꿈, 스핑크스, 그리고 T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미궁,Labyrinthe>이라는 월간지에 실었다. <미궁>은 자코메티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제네바에 머물 때 사귄 알베르 스키라가 창간한 예술-문학잡지다.

자코메티는 포토칭의 임종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마치 구덩이 속에 버려진 고양이의 유해처럼, 그렇게 무의미하고 비참한 조각이 된 시체를 본 적이 없다. 사지는 해골처럼 여위여 널브러져 있고, 배는 거대하게 부풀었으며 머리는 뒤로 꺾였고 입을 벌린 채 죽어있다.” 그 이후 그는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의 몸은 마치 거미의 벗겨진 허물과 모양이 같았다. 그 순간 파리 한마리가 날라와 포토칭의 입으로 천천히 들어가더니 금방 사라졌다. 이 경험은 그가 오래전 한 신사와 여행하던 중, 목격했던 죽음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그 이후, 포토칭의 시신이 그의 기억에 새겨져 한동안 공포에 떨었다.

자코메티는 이 경험으로 사람과 사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머리를 그 주위를 둘러싼 허공에 매달린 물건으로 보았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몸에 붙은 살아있는 머리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은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삶과 죽음의 타부라는 경계에서 공포를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하철, 거리,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끔찍한 침묵 속에 중력없이 공중에 매달린 정지된 물건으로 보았다. 책상이나 의자도 마루에 닿지 않고 공중에 고정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 물건과 물건 사이에 연결은 없으며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광활한 빔만 존재한다.
자코메티의 서술은 사르트르가 1938년에 쓴 첫 번째 철학소설인 <구토>(La nausée)의 서술방식과 유사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역사학자 앙투안 로캉탱은 연금으로 자유롭고 지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는 수년간 여행 끝에 프랑스 항구도시 부빌(Bouville)에 정착하여 18세기 여행가인 롤르봉 (Rollebon) 후작의 전기를 쓰려고 시도하지만 포기한다. 그는 남루한 몸을 끌고 다니며 인간들과 사물들이 그에게 강요하는 속박에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는 메스꺼움은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전에 롤르봉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는 사물과 사람들의 존재를 숙고하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이전 철학들은 본질이 존재보다 근본적이며 부동적이라고 여겼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삶에 대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인간에게 예정된 본질은 없으며, 인간의 본질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매순간 창조되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고, 그 후에 자기 자신과 만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후, 자신을 정의한다. 자코메티는 포토칭의 죽음과 사르트르의 사상을 결합시켜, 1947년자신의 다른 작품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세 조각 작품들을 완성하였다. ‘코’, ‘막대 위 사람 머리’ 그리고 ‘손’이다. 이 작품의 대상은 실재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상상(想像)의 표현이다. 자코메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간의 존재를 포착하기 시작한다. 그는 순간의 존재를 포착하여 표현하는 예술가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