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는 미군 군복을 입은 게 달갑지 않았다. 일본군도 미군도 다 싫어졌기 때문이다.하지만 미군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이수가 자마미 한국인 수용소에 나타나자 40여명의 동지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포로수용소에 들어오면서부터 미군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을 훨씬 우대해주었는데 드디어 미군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사람도 나타났으니 흥분할 수밖에.

한국인 수용소의 중앙에 있는 탁자위엔 담배 초콜릿 비스킷 등이 흩어져 있는 걸로 봐 이들은 이미 과자류는 먹을 만큼 먹은 듯했다. 서상덕이 투박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이수 앞으로 다가왔다.

“야아, 우리 형님이 이렇게 잘생기신 분인 줄 몰랐심더. 미국 군복을 입으니까 인물이 확 달라지셨네예.”

서상덕은 얼른 이수가 메고 있는 위스키자루를 받아들더니 탁자 위에 놓았다.

“형님, 이 자루에 든 건 뭡니까?” “어?, 이거...고급 위스키다. 미군 장교들에게만 배급되는 거지”

“야아, 이거 형님이 오시니까, 미군의 대접이 확 달라지네예. 형님 안 계시는 동안 우리는 영어를 못해가 고생 많이 했심더”

서상덕이 자루 안에 든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들더니 동지들을 향해 고함쳤다.

“자, 우리 형님께서 위스키 5병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가 모두 40명이니까, 오팔이 사십...8명당 1 병씩 돌아간다. 자, 김두임!... 8명에 한 병씩 씩 나눠줘라. 잔이 5개뿐이니까 차례로 따라 마시면 된다.”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동지들이 잔을 받아 차례로 마시는 행위는 마치 엄숙한 ‘의례’를 치르는 것 같았다.

“형님, 이 위스키 일본 독주보다 훨씬 도수가 높네예...하아, 우리가 살아서 이렇게 위스키를 다 마시다니...진짜 기분 좋심더...이제, 형님께서 동지들에게 공식적으로 한마디만 하이소!”
상덕이 모두 모이라고 외치자 위스키를 마신 모든 동지들이 이수와 상덕을 중앙에 두고 둘러쌌다. 이수는 천천히 그리고 차근히 다시 만난 동지들의 얼굴, 얼굴을 차례, 차례로 뜯어보았다. 김수만, 최봉래, 신길순, 황말조, 권태술, 이종락, 김태복, 박삼호, 유성락......

근데 이들을 쳐다보던 이수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머릿속엔 갑자기 이곳에 오지 못한, 다시는 오지 못할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우리는 살아났지만, 야마타에게 맞아죽은 최만순...나하 폭격에 만신창이 된 와촌면 동지들...자결하는 일본군의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은 동료들...말라리아에 걸리거나 하부에 물려 고통 속에서 죽어간 동지들....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억누를 수 없는 회오가 심장에서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다. 회오가 목을 막아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한마디 하려고 해도 쏟아져 나오는 회오를 추스르지 못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조금만이라도 동지, 아니 후배들을 더 보살폈더라도 이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이수의 회오는 몸속에서 제어되지 못하고 끝내 눈물로 주룩 쏟아졌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꺽꺽거리는 음성으로 뭔가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리랑’이었다.

이수의 꺽꺽거림이 ‘아리랑’이란 걸 알아차린 서상덕이 거칠고 투박한 음성으로 군가 부르듯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김수만, 최봉래, 신길순, 황말조, 권태술, 이종락, 김태복, 박삼호, 유성락도 따라 불렀다.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눈앞에서 총 맞고 쓰러졌을 때, 자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을 때, 일본군의 ‘곡괭이 구타’에 서서히 죽어가는 동지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그 어쩔 수 없는 무력함에 한이 맺혔을 때, 천매암을 깨기 위해 곡괭이질을 아무리해도 깨지지 않을 때, 기진맥진한 채 진땀을 흘리며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특공정을 은닉호로 들어 옮길 때...모두가 이를 악물고 아리랑을 웅얼거렸다.

그 아리랑은 모두를 연결시켜주는 저항이자 공감이었다. 아마, 일본군이 아리랑조차 부르지 못하게 했다면, 일찍이 치명적인 폭동 사태가 발생했을지 모른다. 일본군은 백미 밥을 먹고, 조선인 군부에겐 소화시킬 수 없는 현미밥을 줄 때부터 시작된 차별화에 군부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참고 또 버텼다.

참 이상한 일은 아리랑을 부르면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영혼의 힘’이 솟아올랐다. 이 노래는 부르고, 또 부르다보면 그 운율 속에 있는 마력이 허기와 절망과 공포에 찌든 마음을 달래주었다. 짝사랑하던 임이 양손에 맛있는 음식들을 챙겨 넣고 사뿐히 걸어오는 환(幻)이 보였다.

결국 아리랑은 우리를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우대받는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 그래서 오늘의 아리랑은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부르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 돋아나기 시작한 새 소망을 싹틔우는 노래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리랑을 부르는 동안 하나 둘씩 서서히 일어서더니 모두가 서로 어깨를 감은 채 둥글게 돌아가며 덩실덩실 또 덩실 춤을 추었다.

아리랑엔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마력이 내재되어있었다. 건너편 수용소에서 옷도 제대로 제공해주지 않아 밤기운에 떨고 있는 일본군 포로들은 흥에 겨워 춤추는 한국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고, 지금까지 한탄에 빠져있던 동지들의 눈빛은 다가올 밝은 기운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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