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는 온몸으로 팔짝 팔짝 뛰었다. 그녀가 한 번 더 소리치며 뛰어 오르면 미군들이 우루루 달려 나올 것 같아 이수는 우타의 팔을 끌고 아까 하사관이 얘기해준 장교식당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에서 일할 때 우타는 항상 긴장한 모습이었는데, 미군 영역으로 들어오자 신기할 정도로 활기차보였다.

장교식당에 동양인이 나타나자 담당 병사는 기분이 상할 정도로 이상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아래위를 쳐다보다가 어떻게 왔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수는 식권을 내놓으며 우람한 체구의 노랑머리 병사를 침착하게 올려다봤다.

“메뉴 없어요?”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벽에 걸린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발소리를 크게 내며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사실 미군병사가 두 사람을 냉대를 하는 건 인종차별이기도 하지만,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남녀가 너무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식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놀랍게도, 식당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게 아닌가. 이수는 무조건 비프스테이크를 신청하자고 우타에게 제안한 뒤 주방담당에게 큰소리로 캔맥주 2개와 비프스테이크 2개를 신청했다. 그 사이에 식사당번이 바뀌었는지 키 작은 병사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와 깍듯이 인사를 하며 캔맥주 2개를 탁자에 놓고 갔다. 이수는 캔맥주를 따서 우타 앞에 내밀면서 서로 세차게 캔을 부딪친 뒤 단번에 다 비웠다.

그제야 주방 쪽에서 군침을 흘리게 하는 고기 굽는 냄새가 이쪽으로 서서히 번져왔다. 잠시 후 비프스테이크 쟁반 2개가 동시에 탁자에 놓이자 우타는 양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크를 쥐지 않은 채 기다렸다. 대체 이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는 듯 했다. 이수는 우타에게 서양식 음식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려다가, 설명을 해주는 그 자체가 우타의 자존심을 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우타의 스테이크에 소스를 뿌려준 뒤, 아예 우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오른손에 나이프를 들고, 왼손에 포크를 쥔 뒤 급하게 고기를 잘라 한입 물고 씹기 시작했다.

역시 우타는 눈치가 빨랐다. 이수가 두 번째 고기를 입에 넣기도 전에 그녀도 빠른 속도로 나이프와 포크를 잡더니 스테이크를 잘라 입속에 집어넣었다. 비프스테이크와 캔 맥주는 두 사람이 암흑과 위험에 둘러싸여 지냈던 지난 시간들을 빠른 속도로 빨래해주었다.

“근데... 이수씨는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응, 나?...전에 미국에 가려고 했거든”

“네에?... 그런데 왜 저한테는 그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할 기회가 없었지...”

두 사람이 비프스테이크 맛에 흠뻑 빠져있을 때, 식당 문이 열리면서 나이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장교 한 사람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주방담당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뭘 준비할까요?” “응?, 맥주 2캔만 가져다주게”

맥주가 나오자 그 장교는 캔맥주 1캔을 통째로 들이킨 뒤 윗주머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열심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수와 우타에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정신을 집중시킨 채 종이에 빠른 속도로 글을 써내려갔다. 온화하면서도 선이 강해보이는 얼굴에 이마를 타고 내려온 머리카락이 전혀 군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계급장도 없었다.

“어?...저 장교는 왜 계급장이 없지?”

이수는 무엇보다 약간 흐트러진 자세로 메모를 하고 있는, 집중력이 남달라 보이는 그에 대해 아주 강한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그의 집중력을 깨트리는 건 대단한 실례이겠지만, 왠지 앞으로 그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감지되었다. 이수는 일어서서 발소리를 내며 서슴없이 그에게로 다가갔으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장교님, 실례합니다. 말씀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아무 말 없이 이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사람을 흠칫하게 할 만큼 강렬했다.

“장교?...나는 장교가 아니라 기자일세.” “아...그럼 종군기자이시군요. 저는 오늘부터 정보반에서 근무하게 된 미스터 서입니다” “미스터 서(Sir)?, 나는 어니 파일(Ernie Pyle)이오”

그는 잠시 메모하던 만년필을 식탁에 탁 내려놓더니, 팔을 쭉 뻗어 이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는 이수가 다음 말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미스터 서,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마감시간에 걸려 대화를 할 시간이 없다네.” “아,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내일 저녁 6시에 저기 왼쪽에 보이는 보병 내무반으로 오게. 거기서 간단하게 상륙성공 축하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네,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수가 우타의 테이블로 되돌아가자 그는 남은 캔을 손에 쥔 채 벌떡 일어서서 자기 집무실로 되돌아갔다. 막사 밖으로 내다보니 그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조용히 걸어가는데도 장교든, 사병이든, 군속이든, 지나치는 미군들은 모두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더니 천막 뒤로 사라졌다.

식사를 끝내고 정보반으로 되돌아 온 이수는 스템 대위에게 우타는 영어가 미숙하니까, 의무반으로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미스터 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오늘 저녁은 휴식을 취하게. 내일 아침 9시 군무원 임명장을 주고 임시신분증도 발행해줄 테니까. 오늘은 푹 휴식을 취하게” “감사합니다. 대위님”

“내가 특별히 위스키 5병을 선물할 테니까, 포로수용소 코리언 반으로 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코리언 수용인들에게 탈출의 기쁨을 맛보게 해줘야지 않겠어?...아, 그런데 코리언 수용인 가운데 내부 보스인 서상덕이란 친구가 저녁마다 일본군 수용소를 찾아가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골치가 아파. 혹시 서상덕을 아는가?” “네, 아주 잘 압니다.”

“그럼, 잘 됐군. 오늘부터는 코리언이 재패니즈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해주기 바래!” “예, 오늘부턴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스템 대위는 부관에게 위스키 5병을 가져오도록 지시하자 잠시 후 부관이 위스키를 자루에 넣어 들고 와 이수 앞에 놓았다. 이수는 위스키가 든 자루를 어깨에 메고 떠나려다가 돌아서서 대위에게 물었다.
“대위님, 혹시 어니 파일이란 사람, 아십니까?”

“어니 파일?,그럼! 자네 오랫동안 미국신문을 보지 못했군, 어니 파일을 모르다니. 연합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 정말 놀라운 신문기자이지. 마침 그가 우리와 같은 배를 함께 타고 왔어. 그는 ‘미국의 영웅’이 자 ‘연합국의 영웅’이지” “아, 그렇습니까?, 아까 식당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영웅인 줄은 몰랐습니다.”

“전선에서 그와 악수를 한번 하면 ‘기적’을 얻는다는 신화가 있을 정도야. 내일 사무실에 있는 신문철에서 그의 칼럼을 한번 읽어봐.” “그러겠습니다.”

“유럽의 최전방에서 수년간 보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며 쓴 글들이 미국인들을 눈물 흘리게 했지. 그의 글 한편이 모든 군인에게 사명감을 갖게 했어. B-29 폭격기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은 비행기가 있을 정도니까” “네에...그가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와 악수는 했겠지?” “예”

“그렇다면, 미스터 서에게도 ‘기적’이 찾아올 거야” “고맙습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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