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리용역의 아네트

자코메티는 파리와 제네바에서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경험하였다. 그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와 함께 파리에서 아방가드 예술과 문학 활동을 하던 동료들이 사라지거나 죽었다. 그들의 죽음은 자코메티의 아버지나 동생 오틸리아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코메티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경험으로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두발로 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파리에 돌아온 자코메티는 제네바에 있는 동안 제작했던 성냥개비 크기의 아주 왜소한 조각들을 만들고 파괴하는 자기 파괴적이며 편집증적인 증상을 보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사망한 1965년까지 향후 20년동안 전개될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탐구하고 표현하였다.

자코메티의 예술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지 못하고 구경해야만 하는 죄책감과 허약함,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얻는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모두 담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초현실주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예술가였다면, 그 후엔 전쟁으로 상징되는 인간 존재의 허무와 무의미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로 변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자신의 생각, 손, 그리고 작품으로 감동적으로 구현하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된 것이다.

아네트를 그리는 자코메티 / 1954

그는 1946년 부활절에 파리에서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 어머니와 아네트 암을 만난다. 아네트 암은 그가 제네바에 거주하는 동안 만났던 여인이었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삶에 기꺼이 들어오려는 젊은 여인 아네트를 만나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과 사람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인간이었지만, 아네트의 경우에만 예외였다. 아네트는 기꺼이 자코메티 조각과 회화 작품의 모델이 되어 몇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그 당시 자코메티 예술의 위대함을 지속적으로 찬양하고 격려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네트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자코메티의 천재성은 파리의 뒷골목에서 아무도 모르게 소진되었을 것이다.

자코메티는 제네바에서 주로 초상화를 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코메티 앞에서 수 시간 앉아 있어야했다. 자코메티의 예술적인 영감이 떠오르도록 가만히 앉아 인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네트는 예외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앉자 기꺼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아네트는 종잡을 수 없는 20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심각하면서도 새침떼기였다. 또한 과도하게 친절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한 여인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어하는 자코메티의 삶에 아네트라는 여인은 쑥 진입했다. 자코메티는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자코메티가 제네바에서 파리로 돌아 온지 석 달이 흘렀다. 1946년 7월 5일 아네트는 파리에 사는 자코메티와 동거하기 위해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아테트는 제네바에서 평범한 교사의 딸이자 비서학교에 다녔던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이젠 자코메티의 삶에 개입하며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한 흥미진진한 삶의 모험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자코메티와 함께 20세기 예술의 획을 긋는 유일무이한 예술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아네트는 파리 리용역에서 자코메티와 재회한다는 상상에 한껏 들떠있었다. 그러나 역에서 만난 자코메티는 아네트가 기대하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해 본적이 없어 그런 표현이 어색하고 기껏해야 시큰둥한 인사를 마지못해 건네는 세속적인 중년 남성이었다. 실의에 찬 아네트는 그런 자코메티와 일생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코메티를 리용역에 남겨두고 역을 빠져나와 몇 시간 동안 파리에서 홀로 돌아다녔다. 리용역에 혼자 남은 자코메티는 보이지 않는 아네트를 서 너시간 초조하게 기다린다.
누구에게 연연한 적이 없는 자코메티는 이 짧은 시간동안 잠시나마 영원할 것 같은 이별과 허전함을 경험한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아네트가 다시 자코메티 앞에 나타났다. 그의 무관심과 이기심도 아네트의 순애보적인 사랑의 열기를 식힐 수 없었다. 자코메티는 자기 혼자도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자신의 상황과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네트의 도움으로 함께 사는 것이 괜찮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코메티는 아네트를 몽파르나스의 이폴리트 맹드랭 가에 있는 작업실로 데리고 갔다. 아네트는 빅뱅 이전의 혼동 상태같은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보고 거부감보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코메티는 그날 저녁에 아네트를 데리고 생제르맹 데 프레에 위치한 카페 뒤마고에 가서 화가 피카소Picasso, 발튀스Balthus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아네트가 자코메티의 이전 여자 친구인 이사벨과 전혀 다른 인물이란 점에 놀랐다. 아네트는 매력적이며 친절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풋내기였다.

나체로 서있는 여인

자코메티는 아네트에게 때때로 아버지로 행세했다. 그가 자신에게 자학적인 것처럼, 그녀에게도 자학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아네트는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처럼 이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자코메티의 동생 디에고가 형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비위를 잘 맞춘 것처럼, 자코메티의 미성숙한 행위를 응석으로 받아주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자코메티가 아네트와 지내면서, 생활이 안정되고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아 나섰다. 그는 아네트를 통해 향후 20년 동안 헌신할 여성 조각과 회화의 문법을 만들었다.

나체로 서있는 여인 / 1946 / 소묘 / 53.5x 28.5cm / 얀 크루기어 미술관, 제네바

이 소묘는 자코메티가 1946년 아네트를 모델로 그린 소묘다. 자코메티는 더 이상 왜소한 그림이나 조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델을 정확하고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시선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작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왜소함은 자코메티가 모델을 자신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표현하겠다는 이기적인 시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시선으로 대상 자체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표현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그 왜소함은 수직으로 늘려 표현하는 방법이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에서 여인을 길게 늘려 그렸다. 그는 연필을 이용하여 몸 전체의 윤곽을 잡기 위해 여러 번의 선으로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그녀의 얼굴 윤곽을 그렸지만, 이 얼굴에는 눈, 코, 입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잘록한 허리와 둔부가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었고 팔과 발은 그 위치만 표시하였다.

키 큰 여인 / Standing Woman (“Leoni”) /1947 /청동주조 / 1957 / 153cm (단포함) / 구겐하임 재단 소장, 베니스

이 작품은 1947년에 석고로 제작된 후 1957년 다시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소묘로 시작된 자코메티만의 늘어진 인물상의 원형이다. <키가 큰 여인>은 고대 이집트 여인상들처럼 정면을 바라보고 발을 고정시킨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여 재현하였다. 이 조각이 내뿜는 허약함과 허무함이 그녀를 주위로부터 격리시켰다. 그녀의 몸은 자코메티의 손가락의 눌림이 음각과 양각을 두드러지게 만들어 조도(照度)에 따라 살아 움직인다. 자코메티는 1942년에서 1946년까지 성냥개비만한 왜소한 작품을 만들어 거리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모양이 사라지는 그 원근과 시선에 집중해왔다. 그는 이제 실물 크기의 서있는 여성을 통해 그 존재감과 무게감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과 달리 무게감이 없다고 말한다. 그 사람의 존재를 품는 육체가 무게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자코메티의 획기적인 조각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물론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 아네트를 만나, 촉발되었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인 이유는 토니오 포토췽Tonio Potosching 폴란드 예술가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 포토췽은 자코메티와 아네트가 사는 주거지의 관리자였다. 그는 간암에 결려 수개월 동안 앓다 죽는다. 그는 다시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깊이 느낀다. 그는 1946년 12월 <꿈, 스핑크스, 그리고 T(토니오 포토췽)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펼칠 새로운 예술 세계를 그렸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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