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작업복에 젖은 신발을 끌며 포로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심문을 받기 위해 후줄근한 모습으로 줄을 서있는데, 서상덕이 양손에 캔맥주 2개를 들고 환한 얼굴로 달려왔다.겨우 나흘 만에 보는데 서상덕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너무 달랐다.

‘장비’처럼 텁수룩하던 수염은 깨끗이 면도해 반짝 반짝 빛났고, 손질한 머리카락에 머릿기름을 발랐는지 윤기가 줄줄 흘렀고, 그새 살이 붙어 더 건장해보였으며 볼에서도 광채가 났다. 이틀을 굶은 데다 얼굴 곳곳이 할퀸 이수의 형상과는 두드러지게 대비되었다.

“형님, 어서 오이소.” “어!...상덕아, 반갑다...”

서상덕은 들고 온 캔맥주를 따더니 이수와 우타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는 젖은 작업복에 초췌해 보이는 우타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형수님, 고생 많았심더...”

목이 말라 말하기조차 힘든 두 사람은 상덕이 준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때 흑인 병사 한 사람이 이수와 우타보다 먼저 포로수용소를 들어와 줄서있는 다섯 명의 한국인 군부들에게 영어로 물었다.

“아유 재패니즈?”

군부들은 모두 그 병사의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이수가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낫 재패니즈, 위 아 코리언!”

“아?, 당신 영어합니까?”  “예, 합니다.”

“아, 그래요?...어느 정도 하세요?”  “통역도 가능합니다.”

좀처럼 자만심을 나타내지 않는 이수지만, 오늘은 한국인 군부 동지들의 위상을 되찾아주기 로 작정하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수의 자연스런 영어발음은 금방 효과를 나타냈다. 대답이 끝나기 바쁘게 흑인 병사의 표정이 확 달라지더니 뒤쪽에 서있는 백인장교에게 급하게 달려갔다.

“대위님, 저 친구가 통역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마침 잘됐네. 통역병이 없어 행정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저 친구가 정말 통역을 할 수 있는지 면접을 한번 봐야겠군...저 두 사람을 지금 내 집무실로 데려오게!”

흑인병사가 다시 이수에게로 다가와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이수와 우타를 보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포로수용소의 철조망을 지나 담당 대위의 막사로 들어서자 대위는 간이의자 2개를 내놓으며 이수와 우타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는 신상을 기입해달라며 서류와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서류엔 성명 국적 생년월일 성별 주소 출생지 등을 기입하는 항목이 있었는데, 이수가 두 사람의 서류를 모두 작성해 대위에게 내밀었다.

“나는 미군 제 77사단 정보장교인 스템 하워드입니다. 스템이라고 불러주세요”

스템 대위는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질문했다.

“미스터 서...두 분은 어떤 관계입니까?”  “부부입니다.”

“네에...미스터 서, 우리 미군은 3월27일 니미츠포고에 의해 자마미를 포함한 게라마지역 전체를 미국령으로 선언하고, 이 지역의 모든 행정을 미군 제 77사단이 맡게 되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합니다”

“근데 우리는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선 잉글리시 코리언 재패니즈가 능통한 미군 군속 통역관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통역뿐 아니라 영어로 된 공식서류를 일본어로 번역, 작성하고 통보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당신이 그런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몇 가지 심사를 했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서류에 성실하게 답변하겠다는 서명을 해주십시오. 답변 내용이 거짓일 경우 나중에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수는 정보장교가 내어준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우타에게도 서명을 하게 한 뒤 서류를 대위에게 내밀었다.

“먼저,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당신은 대학을 다녔나요?”  “네, 도쿄대학을 나왔습니다.”

“전공은?”  “식물학입니다”

“식물학을 했는데, 어떻게 영어가 그렇게 유창합니까?” “유창하진 않지만...미국에 공부하러 갈 예정이었습니다.”

“어느 대학에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 대학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애드리언스 포스터 교수에게 지도받고 싶어서였습니다. 박사과정 편입허가를 받았는데, 전쟁이 터져 못 갔습니다. ”

“그러니까, 식물해부학을 하고 싶었던 거군요...”  “어? 네!...포스터 교수의 전공을 아시는 걸 보면 대위님도 식물학을 하셨나보네요?”

“아니오, 버클리를 다녀서...그 교수를 잘 압니다.”  “그러세요? 그럼, 대위님은 전공이 뭡니까?”

“화학이요”  “아...그럼, 오펜하이머 교수의 강의를 들었겠네요.”

“...한 학기 들었죠...전쟁 때문에 그도 지금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오펜하이머 교수님 강의를 꼭 듣고 싶었는데...”

“식물학이 전공이라면서요?”  “예, 그렇지만 저는 인공광합성을 연구하기 때문에 화학부문에서 오펜하이머 교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그래요?...그건 그렇고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은 지금, 솔직히 미국편입니까, 일본 편입니까”  “저요?...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저는 코리아 편입니다.”

“그래요?...코리아편이란 건, 명백히 일본 편은 아니란 걸로 해석해도 됩니까?”  “당연합니다.”

스템 대위는 우타의 서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국적을 적지 않은 걸 확인하곤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당신의 아내는 일본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아내는 류큐인입니다”

“류큐인이란 오키나와인이란 뜻입니까?”  “예, 제 아내의 얼굴을 보십시오. 일본인들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네에...그렇네요...좋습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단 미스터 서는 내일부터 제 집무실에서 근무하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부인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제 아내는 간호사입니다. 의무실에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을 담당하게 해주십시오.”

“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로선 최고의 행운이죠. 왜 이 서류의 자격 란에 그걸 적지 않았어요?”

스템 대위는 우타의 서류에 직접 ‘간호사’라고 기입했다. 그는 두 사람의 서류에 서명을 하게 한 뒤 부관을 큰 소리로 불렀다.“하사, 이 두 사람에게 장교막사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해주고, 미군군속 복장으로 갈아입게 한 뒤, 장교 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식권도 제공해주게”

그러자 하사관은 군수품 막사로 가서 이수와 우타에게 미군 작업복을 고르게 한 뒤 샤워시설을 안내해주고, 식권도 건네주었다. 밖으로 나와 둘러보니 자마미 미군본부는 상점에서 의료시설까지 일개 도시가 가진 거의 모든 편의시설을 다 갖춘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건 막사 안을 돌아다니는 군인들의 행태였다. 정말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기타를 치며 괴성을 지르는 병사도 있고, 복장도 제 맘대로 걸쳐 입은 데다 단추까지 풀어헤친 채 돌아다녔다.

이수는 바쁘게 샤워를 하고, 미군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정보사관 사무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우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15분을 더 기다렸을까? 우타가 저편에서 활짝 웃으며 춤추듯 걸어왔다.

찢어지고 얼룩진 일본군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깔끔한 미군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칼로 나타난 우타는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한 듯 너무 돋보여서 조금 생소했다. 1시간만에 그녀의 모습과 삶이 확 바뀌어버렸다.  이수를 향해 걸어오던 우타가 갑자기 하늘로 풀쩍 뛰어오르며 꽥 고함을 질렀다.

“얏타!!, 드디어, 탈출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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