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데 한바퀴 돌까? 조금 멀리 튈까? 그냥 뒹굴뒹굴 오달지게 퍼질까?" 휴일 전날이면 이처럼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이다. 이랬다 저랬다 몇번씩 결정을 뒤집기도 한다. 그렇다고 결정장애까진 아니다. 산행에 대한 설레임일뿐.

즐거운 고민 끝에 낙점한 곳은 연천 고대산. 결국 조금 멀리 튀기로 결심했다. 6.25전쟁 막바지에 피아 간 치열한 전투로 고지의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는 백마고지를 지척에 둔 산이다.

샐러리맨들에게 수요일의 공휴일은 알토란과도 같다. 이번 현충일이 그렇다. 날이 날인만큼 호국영령의 넋이 서린 고대산은 현충일 맞춤산행지로 느낌이 딱 좋다.

조기(早起)하여 조기(弔旗)를 게양 후 집문을 나섰다. 아파트 여러 棟에 내걸린 태극기는 고작 열개 안팎이다. 언제부턴가 현충일이나 국경일에 태극기 게양은 귀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입맛이 쓰다. 차를 몰아 112km를 달려 10시 30분, 고대산 등산로 주차장에 닿았다.

주차장이 널널하다. 글램핑장도 한산하다. 산객 역시 뜸했다. 국경일과 달리 현충일이라서일까? 아무튼 홀로 적막함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다.
주차장 한켠에 세워놓은 산길 안내판을 살펴보며 오늘의 코스를 머릿속에 새겼다. 정상을 향해 맨 오른쪽 산자락이 제1등산로, 가운데가 제2등산로, 맨 왼쪽이 제3등산로다. 제2등산로를 들머리로 칼바위능선 > 대광봉(810m) > 삼각봉(815m)을 거쳐 정상인 고대봉(832m)을 찍고서 하산은 제3등산로를 따라 표범폭포를 거쳐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등산으로 북녘 산야를 바라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산 중 하나가 고대산이다. 하여 산정에서 북녘 산야의 조망을 고대하며 고대산 숲길로 들어섰다.

여름 숲은 깊고 짙다. 6월 초입에 찾은 고대산은 더욱 그러했다. 이따금씩 산새들의 지저귐과 물소리, 바람소리 뿐, 고요 그 자체다. 말그대로 적막강산이다.

산길을 가리키는 팻말이 유난히 튄다. 여느 산에서 보지 못한 칼라다. 느낌이 신선하다. 짙푸른 이파리들은 겹겹이 그리고 촘촘하게 어우러져 낯선 산객에게 그늘을 무한 제공한다. 땀냄새를 쫓아 달려들어 귓전에서 앵앵~대는 산모기들도 이곳엔 없다. 오염원 없는 최북단 산의 치명적 매력이다.

정상에 오르는 3개 등로 중 제2코스가 가장 짧다. 반면에 가장 가파르다. 셔츠는 이미 땀범벅이다. 모자챙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점점이 목계단을 적신다. 무시로 불어오는 골바람이 있어 견딜만 하다.

말등바위를 지나 칼바위 전망대에 이르는 동안 만난 산객은 단둘뿐. 산 전체를 전세낸 기분이다. 전망대 쉼터에 배낭을 내렸다. 이 공간에 오로지 혼자다. 이대로 발가벗은 채 데크에 누워 삭신을 신록에 내맡기고 싶은 발칙한 생각이 든다. 왜일까? '나는 자연인이다'를 많이 본 탓이다.

칼바위 능선에 서니 좌우로 천길벼랑이다. 정수리가 뜨끈할만큼 햇살이 따갑다. 바짝 달궈진 쇠줄을 당겨 잡아가며 힘겹게 암릉구간을 벗어났다. 다시 능선 숲길로 들어섰다. 최전방의 군 작전지역이라선지 곳곳에 참호와 빈 초소가 눈에 띈다.

팍팍한 된비알 길은 칼바위 능선을 벗어나자 조금은 완만해졌다. 나뭇잎사이로 언뜻언뜻 하늘이 비치더니 이내 조망이 탁 트였다. 저만치 시야에 들어온 쉼터 정자가 몹시 반갑다. 고대산의 3봉(대광봉, 삼각봉, 고대봉) 중 하나인 대광봉(810m)에 올라앉은 ‘고대정’이다.
고대정에 올라 배낭을 열어 먹을거리를 꺼냈다. 떡 한조각과 파프리카 한개가 오늘의 행동식이다.

아쉽게도 가시거리가 썩 좋지는 않다. 철원평야 너머로 보이는 북녘 산줄기가 희미하다. 저멀리 하늘금을 그으며 일렁이는 산능선은 부드럽고 평화롭다.
이곳 대광봉에서 정상인 고대봉까지는 500미터, 정상에 선 산객들의 움직임이 또렷하게 시야에 잡힌다.

삼각봉(815m)에 이르니 모노레일이 등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산아래에서군용물자를 실어 산 정상을 지나 제3등산로 방향 군부대로 운반하는 삭도다.

해발 832m의 고대봉은 족구를 해도 너끈할 정도로 넓고 편평하다. 산정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럭셔리한 헬리포트다. 텅 빈 정상부를 홀로 서성이다, 제3등로 방향으로 내려섰다. 목계단과 폐타이어를 활용한 계단이 무시로 반복된다. 등로와 나란히 가던 삭도는 등로 길목의 군부대 안으로 사라졌다.

숲속 길 목계단은 정말이지 하염없다. 통나무를 겹쳐놓아 만든 계단이라 들쑥날쑥해 진땀이 바작바작 난다. 그렇게 얼마나 고도를 낮췄을까? 표범바위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정표는 제3등로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절경 방향을 가리킨다. 바로 오른쪽 계곡 속에 표범폭포가 감춰져 있다. 등로에서 우측 아래로 비껴나 있어 무심하게 걷다간 그냥 지나치고 만다. 물소리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섰다. 바위면을 타고 흐르는 계류가 졸졸 거린다. 폭포수라고 하기엔 민망스러울 정도. 여름 가뭄인가?

날머리가 가까워진 듯 계곡물이 제법 불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계류에 발을 담갔다. 차디차다. 산길을 벗어나 주차장에 이르는 길, 중천에 뜬 해가 정수리와 목덜미를 뜨겁게 달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숲길에서 나올 걸 그랬나?

기차로는 신탄리역에 내려 고대산 입구까지 약 1km를 걸으면 등산로 들머리가 나온다.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봉제산업 전문지, '월간 봉제기술'에서 데스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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