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쓰키산은 이미 미군이 점령했을 테니까 이수는 아사마을 쪽으로 가다가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 좌측으로 올라가 능선을 타고 반도쿠루산 진지로 올라갈 작정이다.

근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사마을에서 반도쿠루산 기슭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무장한 일본군 약 80여명이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이수를 발견한 일본군 하사 2명이 이수의 어깨를 잡아채더니 아베 중대장 앞으로 데려 갔다.아베 중대장은 이수를 알아채고 그냥 풀어주라고 했으나, 에구치 중대장이 다가와 이수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콱 잡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이수를 아래위로 살펴봤다.

“이시타 조장, 자네 지금 혼자서 어디 다녀오는 거야. 저 아래쪽은 미군 진영인데 어떻게 거기를 통과해서 왔지? 좀 수상한데...?”

“예, 중대장님, 저는 미군들이 다카쓰키산을 점령하고 있어서 아사마을 입구를 돌아 이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래? 그쪽엔 미군이 없었어?”

“예, 아사마을 쪽은 미군이 없고, 다카쓰키산 방향에선 그들의 음성이 조금 들렸습니다.”

“그래?...알았어. 우리는 지금 다카쓰키산의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가는 중이야. 스파이가 아니라면 자네도 우리를 따라와. 여기서 도망친다면 스파이로 몰릴 테니까.”

“근데....에구치 중대장님, 혹시 이치카와 중대장님 못 보셨어요?”

“응?...이치카와 중대장은 아카사치산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러 가셨다.”

에구치 중대장은 이수에게 수류탄 2개를 건네주었다. 이수는 수류탄 2개를 바지주머니에 넣고 어쩔 수 없이 약 80여명 쯤 되는 공격대원들 뒤를 고개를 낮추어 따라갔다. 일본군은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해가 저물 때까지 잠복해 있다가 자정 무렵 다카쓰키 산기슭의 미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아베 중대장이 지휘하는 제1중대는 왼쪽 기슭을 맡고, 에구치 중대장이 지휘하는 제2중대는 오른쪽 산길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이수는 제2중대에 배속되었다.전투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 이수이지만 오늘밤은 일본군이 야간전투를 벌이기에 유리한 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음력 12일이어서 거의 보름에 가까운 달이 다카쓰키산 일대를 하얗게 조명하고 있었기 때문.

무기가 부족한 일본군으로서는 야음에 공격해야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달이 밝으면 중무장한 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군이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다카스키산 기슭으로 올라가자 갑자기 미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너무 가까운 곳에 미군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이수는 산길 오른쪽에 도랑을 발견하고 그리로 단번에 굴러가 떨어졌다. 단 한 번의 미군 기관총 소사에 거의 10여명이 쓰러졌다.

제2중대 병사들은 도랑 덕분에 몇몇이 목숨을 건졌지만 제1중대는 다시 불을 뿜는 기관총을 피할 곳이 없어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몸 어느 한 군데 총탄을 맞았다.복부를 관통 당한 사에키 소위가 고통을 참으며 신음하다가 겨우 의식을 찾아 가까이 있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나는 복부관통상을 입어 먼저 자결한다. 너희들도 부끄럽게 죽지 마라...천황폐하 만세!”

그가 권총으로 자기의 머리를 쏘자 가까이 있던 부상당한 부하들도 연달아 자결했다. 서너 발의 자결하는 권총소리가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이수는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지도 않은 채 끝까지 도랑 속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미군의 기관총소리가 멈춘 지 30분쯤 지나서야 이수는 고개를 들고 도랑 밖으로 기어 나왔다. 미군들은 이미 전투현장에서 철수해버린 뒤였고 살아남은 몇몇 일본군도 반도코루산 쪽으로 도망친 뒤였다.

이수는 그래도 겁이 나서 달빛이 스며들지 않은 나무 그늘을 따라 전투현장으로 가보니 에구치 중대장은 긴 칼을 쥔 채 드러누워 전사했고, 아베 중대장은 사병의 시체 밑에 깔려 숨을 거두었는데 모자는 벗겨지고 입에서 아직 피가 멎지 않았다.

80여명의 일본군 공격대원은 2개의 기관총좌 앞에 20분도 안 되는 접전에서 적어도 7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보였다. 아베 중대장 옆으로 여러 병사가 쓰러져 있고, 움푹 파인 곳으로 피가 나뭇잎 사이를 검붉게 물들이며 흘렀다. 죽은 사람의 팔과 다리를 밟지 않고선 움직이기 어렵고, 시신을 외면하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뗄 수 없는 적막한 공간에서 이수 혼자만 얼쩡댔다.

그는 아베 중대장 뒤편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기관총좌를 향해 습격할 때 과감히 자동소총으로 저격하던 병사가 있던 걸 기억해냈다.이수는 그 병사가 저격하던 쪽으로 가보니 얕게 파인 둔덕아래 미군을 향해 자동소총을 쥔 한사람의 시신이 달빛에 희뿌옇게 드러났다.

이수는 순간 실신할 뻔 했다. 그 군인은 이치카와 중대장이었다. 아까 미군의 기관총좌가 붕괴되면서 이 전투가 끝났는데 그 총좌를 뒤에서 저격한 사람이 바로 이치카와 중대장이었던 것이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아카사치산에 진지를 구축한 뒤 아직 실전경험이 없는 후배장교들이 못미더워 저격용 자동소총을 들고 뒤따라 내려온 것으로 보였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사격자세에서 고개만 약간 돌렸을 뿐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엎드려있었다. 이수는 더 가까이 가서 확실히 이치카와 중대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들추어보았다.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를 옷소매로 닦아주다가 갑자기 너무나 의혹적인 모습에 손을 떨었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미군의 총에 맞은 게 아니었다. 엎드려 사격을 하고 있는 중에 누군가가 등 위에서 쏜 총알에 맞은 거였다.

거듭 또 거듭 확인했지만 총알 2발이 분명히 등에서 심장으로 관통한 거였다. 미군과 교전을 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등 뒤에 와서 권총으로 이치카와 중대장을 가격한 게 틀림없었다.

“아....이건 아무래도...나카타의 짓이구나!”

이수는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나카타에 대한 증오심에 울부짖으며 숨 멎은 중대장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이 폭발하듯 분쇄되었다.

[이수의 증오심을 달래기 위해 이파는 자마미 골목에서 한바탕 춤을 췄다]

이수는 그래도 지금까지 내면적인 굴욕을 용납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힘써왔는데 지금, 그가 소속된 이 세계는 어딘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머릿속이 그냥 멍해졌다.이치카와 중대장의 이런 허망한 죽음 앞에 옳고 그름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이며, 절망 항변 흥분 분노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몸뚱이에 아직 목숨이 붙어있기 때문인지 서서히 흥분 항변 분노가 뒤섞여 올라오자 구토가 일어났다.이수는 구토를 하면서도 나중에 이치카와 중대장의 시신을 다시 찾을 수 있게 새총모양의 나무막대기 하나를 그의 머리맡에 꽂았다.

다시 미군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까 이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장의 억울한 죽음은 이 자마미섬의 ‘보석동굴’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근데 많은 시신 위를 걸으니까 이수는 자신도 이 시신 중에 하나인데 영혼만 몸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피 냄새 속에서 입을 벌린 채 혼자서 허우적대자 걷잡을 수 없는 처참한 외로움이 달빛에 부서졌다.

외로움이 부서지고 또 엷어지자, 갑자기 나카타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이수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수의 가슴에 중대장을 잃은 낙망감이 서서히 복수심으로 채워졌다. 뇌가 송곳에 찔린 듯 찌릿한 증오심이 이마를 뚫고 치솟았다. 증오심이 다시 그를 일어서게 하고, 그를 움직이게 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인 (주)기업&미디어의 발행인.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계속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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