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禁忌)

1930년대 프랑스 지식인들은 인간심성에 내재해 있는 공격성과 죽음이란 주제에 매료되었다. 자코메티에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 프랑스 사상가였던 조르주 바타유(1897- 1962)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존재의 무상함과 허약함에 개탄하였다. 바타유는 인류의 가장 어둡고 폭력적인 행동들, 도덕적인 경계를 초월하고 무시하는 위반(違反)적 행위들, 금기(禁忌)와 타부(taboo)를 파괴하는 대담한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는 심지어 죽음의 언저리에서 인류가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혐오(嫌惡)적인 생각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구역질나게 만드는 것들이 그에게는 창작 예술의 영감이자 대상이었다.

바타유의 사상은 그의 삶의 정황을 통해 감지된다. 그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장님이 되었다. 바타유가 세 살이었을 때다. 그의 아버지는 사지마비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불행한 가정사는 그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1914년 성년이 된 바타유는 부모의 무신론에 반기를 들어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타유와 그의 어머니는 반신불구가 된 아버지를 고향 랭스(Rheims,프랑스 북동부의 상공업 도시)에 버려두고 떠난다. 2년뒤 그의 아버지는 죽는다. 그는 1917년 아버지를 죽도록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신부가 되고자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하지만 그 여인이 바타유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돼 바타유와 헤어진다. 그는 신학교에서 자신을 상투적인 우아함과 지적인 허영으로 장식하려했던 가식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해체적인 삶을 글로써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바타유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학자이자 지식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려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유한다. 바타유가 1928년에 쓴 소설 <눈 이야기> (L'histoire de l'oeil)는 십대 연인들의 성도착적인 행위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한 대상에 대한 ‘시선’(視線)을 바타유 소설을 통해 새롭게 정립한다.

극단(極端)

바타유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자코메티는 1929년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중심인 시인 앙드레 브르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브레통은 바타유와는 달리 프랑스 정통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空想)과 환상(幻想)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브레통은 자코메티를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조각가로 찬양하였다. 자코메티는 1933년 아버지의 죽음과 1937년 여동생 오틸리아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아폴로적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떠나, 다시 바타유의 디오니소스적인 초현실주의로 돌아간다. 자코메티와 바타유는 둘 다 자기학대와 가학증이 야기한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들은 모두 고통과 취약성의 상징인 창녀들에 자연스럽게 매료되었다.

자코메티는 가능과 불가능,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기 파괴적인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193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괄목할 만한 예술적인 성과가 없었다. 매일 밤 창작과 파괴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숭고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타유는 절망적인 현실 안에서 새로운 불빛을 보았다. 그는 초기 인류가 빙하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모여 살면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주장하였다.

바타유는 1937년 다른 프랑스 지식인들과 ‘콜라쥬 드 소시올로기’(Collège de Sociologie) 즉 ‘사회학 집단’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이 단체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초현실주의가 개인의 무의식에 집중하여 인간 경험의 터전인 사회의 역할을 축소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사회 안에서 인간의 거룩함과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바타유는 이곳에서 <죽음을 직면하면서 생기는 기쁨>(Joy in the face of Death)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 최선의 삶은 죽음을 의식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만끽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자유’란 삶의 모든 가능성이 무너지는 절망의 끝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유롭게 사는 삶이다. 그는 도서관 사서와 편집자로 일하면서 겉으로는 규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실질적인 삶의 모습은 무질서, 극단, 그리고 ‘비정형’(informe) 그 자체였다. 바타유의 철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코메티의 조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제네바 생활

자코메티는 1940년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열흘동안 동생 디에고, 디에고의 여자친구 넬리와 함께 프랑스 남부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나치스가 파리를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들, 잘려진 몸들, 겁에 질린 피난민들을 목격한다. 특히 여행도중 나치스 폭격기가 피난민들을 사격하여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자코메티는 여행을 포기하고 버려진 자동차와 불타고 있는 마을 사이를 지나 파리도 돌아온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알리는 <왜소한 조각들>을 수없이 제작하고 파괴한다. 낮에 즐기던 카페의 대화나 저녁에 탐닉하던 클럽의 파티는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차라리 어머니 아네타가 살고 있던 스위스 제네바로 떠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잠정적인 피난이 그를 제네바에 4년 동안 묶어놓는다. 어머니 아네타는 죽은 여동생 오틸리아의 남편 프란시스 베르트후드의 넓은 집으로 이사하여 1937년에 태어난 조카 실비아를 돌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었던 자코메티는 매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어머니의 간섭을 참지 못하고 허름한 호텔로 거주지를 옮긴다.

제네바 생활은 프랑스에서 명성을 쌓던 자코메티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제네바에서 독립하기 위해 아버지의 유산 일부를 달라고 요구한다. 물론 아네타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아네타는 자코메티를 담배와 술에 찌들어 쓸데없어 보이는 조그만 조각상을 수없이 만들다 부수는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제네바의 자코메티는 작업하다 뒤집어 쓴 회 먼지를 털지도 않은 채 남루한 옷을 입고 살아가는 무명인 꼴이었다. 하루에 담배 80개비를 피우고 커피는 10잔 이상 마셨다. 그가 이전에 아무리 천재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처럼, 너무나 인간적이며 애절했다.

전차위의 여인

자코메티는 제네바 생활을 통해 삶의 분기점을 만든다. 그는 인생의 좌절감과 분노,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런 파괴적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조각 작업에 전념할 방법을 찾는다. 그는 운명적으로 자신이 처음 회화와 조각을 시작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1942년 1월, 그는 자신의 고향 말로야(Maloja)를 방문한다. 그곳엔 아직도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의 작업실이 있었다. 그 작업실에는 풍요여신을 기념하는 커다란 조각 작품인 <1+1=3>가 남아있었다. 왜소한 조각에 오랫동안 몰입했던 자코메티를 실물크기의 조각으로 전환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1=3>다. <1+1=3>는 고대 신화에 등장한 키프로스 섬 남서쪽에 위치한 파포스(Paphos)라는 해안도시에서 발견된 풍요여신 아프로디테 여신상을 표현하였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이곳에서 기원전 3000년경 다양한 조각상으로 등장하여 후에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었다.

1+1=3 / 1934년, 160cm /말로야 작업실

자코메티는 신을 경배하는 실물 크기의 조각상 <전차위의 여인>을 제작하였다. 초현실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의심과 좌절로 작은 조각들만 수 없이 생산했던 그였다. <전차 위의 여인>은 자코메티가 인생 후반에 만든 작품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신호탄이다. 여인이 직사각형 단위에 서 있다. 그 단은 다시 나무로 제작된 바퀴달린 플랫폼에 놓여있다. 이 여인은 이집트 파라오나 귀족들의 장례부장품으로 들어가는 여인동상처럼 두 다리와 발이 붙어있고 몸도 꼿꼿하다. 두 팔도 몸에 밀착되어있다.

전차 위 여인 / 1942-43년, 164cm / 독일 뒤스부르크, 빌헬름-렘브룩 미술관

자코메티는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자코메티가 조각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그 형상을 발견하였다. 그는 아버지 지오반니가 오틸리아를 조각할 때, 오틸리아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오틸리아는 지금 굳건한 제단위에 이집트 여인처럼 가장 간결하고 단호하게 서서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가 서있는 단을 떠받치는 제단아래 바퀴달린 플랫폼은 아마도 오틸리아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실비아가 제네바 집에서 타고 다니던 바퀴달린 장난감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실비아를 낳자마자 죽은 오틸리아가 장난감 전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여인은 몸에 움직임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그녀의 부동성은 자코메티와 그의 어머니 아네타 상황과 일치한다. 아네타는 이 전쟁 중에 말로야에서 살다 손자 실비오를 보살피기 위해 제네바를 떠날 수 없었다. 자코메티의 인생도 파리, 제네바, 그리고 말로야를 1922년부터 그가 사망한 1966년까지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조각상의 핵심은 바로 바퀴에 있다. 이 바퀴는 야금술, 금속공예, 수공업, 조각을 관장하는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와 관련이 있다. 헤시오도스가 기록한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여신이 제우스 없이 낳은 아들이 헤파이스토스다. 그 아이가 너무 작고 못생기고 시끄러워 올림포스 꼭대기에서 아래도 던졌다. 아이가 하루 종일 추락하여 땅에 떨어지면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지상에서 망치와 집게를 들고 모든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 신이 되었다. 그가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자 삼발이 바퀴가 장착된 ‘스스로 움직이는’ 오토마톤(Automaton)을 만들어 그를 돕게한다. 자코메티는 스스로를 조각과 예술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유사하다고 믿었다. 그는 1938년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일생을 절뚝거리게 된다. 그는 <전차 위의 여인>을 통해 창작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처럼 새로운 조각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1) 관조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