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야카비섬 북쪽에 있던 대형전차양륙함(LST)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의 수륙양용전차부대는 해군의 선도정을 따라 가히섬과 아마마을 앞바다를 지나 곧장 자마미마을로 상륙해왔다. 3월 26일 아침 9시였다.

자마미 항구에 상륙한 미군은 브루스 장군이 지휘하는 제 77사단의 305보병연대 제 1대대 병사들이었다. 이 상륙부대는 3월25일까지 미군 수륙양용지원군(ASF)의 지원을 받아 자마미 앞바다와 가히섬과 아기나시쿠섬 앞바다에 있는 산호초와 바위 등 상륙작전을 방해하는 암초들을 제거한 상태였다.

하지만 자마미 마을 바로 앞에 설치된 3m 높이의 시멘트벽은 파괴하지 못했다. 상륙한 수륙양용탱크가 이 시멘트 벽 앞에 정지하자 100여명의 병사들이 하선해 벽 아래에 허리를 구부린 채 대기했다.

이수는 간자산 기슭에서 미군들의 행동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대기하던 병사들 가운데 2명이 시멘트 방벽을 뛰어넘어 마을 첫째집 앞으로 와서 기관총을 몇 발을 드르륵 쏘았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두 병사는 방벽 너머에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미군 100여명은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자마미 마을을 점령했다.

이수가 보기에 미군의 움직임은 두려워하거나 웅크리는 기색이 전혀 없고 너무나 늠름해 보였다. 이들은 마을 안에 일본군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항구 앞 가쥬마루 나무에 높은 깃대를 꽂더니, 커다란 성조기를 게양한 뒤 모두 음악에 맞춰 성조기에 경례했다. 미군은 이미 자마미 마을의 전투부대가 모두 산악으로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 굉장한 물량의 군수품을 내려놓더니 마을 복판에 막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날 미군이 상륙해오는 동안 일본군이 그토록 조선인 군부들을 괴롭혀가며 온힘을 쏟아 은닉호를 만들고, 혼신을 다해 공격훈련을 했던 특공정 마루레는 단 1대도 출정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군 전대장도, 중대장도, 어떤 장교도 특공대원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공격하겠다던 특공정 하사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 없었다.

미군은 상륙한지 3시간 만에 자마미 마을 뒤에 있는 다카쓰키산까지 점령했다. 미군이 다카쓰키산을 점령하는 동안 아마마을 쪽의 몇몇 일본군들이 소총사격을 하긴 했으나 그건 조준된 사격이 아니라 그냥 하늘로 발사하는 위협사격에 불과했다.

미군가운데 일부는 후루자마미 해변 모래사장 쪽으로도 공격을 해왔는데, 이곳에 상륙한 미군들이 미처 은닉호에 숨기지 못한 특공정 마루레를 발견하고, 함선에 연락을 취하자 함재기들이 날라 오더니 특공정을 소사해 단번에 박살을 냈다.

이수는 더 이상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함포사격을 받은 특공정의 널빤지가 온 바다에 둥둥 떠내려가자 그는 후루자마미 해변 중앙부분 산기슭에 있는 해상정진전대 제2중대 방공호로 숨어들어갔다. 2중대 방공호는 다른 방공호에 비해 규모가 컸는데 그 방공호안에는 군인, 군부, 주민 등 150 여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미군이 다카스키 산중턱으로 올라가자 해상정진 제2중대 아베 중대장이 호안으로 들어와 큰소리로 고함쳤다.

“일동주목!...귀축미영이 저렇게 물량공세를 해오지만 결국엔 황군이 승리한다. 곧 응원군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부대를 반도코루산으로 이동, 거기에 진지를 구축한다. 전 부대원은 모든 장비를 갖추고 각각 소대별로 흩어져서 반도코루산 정상에 집결하라. 비전투요원들은 제2중대호 입구에서 수류탄 1개씩을 받아 만일 미군에 발각됐을 경우 수류탄 핀을 뽑아 미군에게 던지기 바란다...필승(必勝)!”

[이런 상황, 이런 표정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베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특공대원들은 자기 군장을 챙겨 삼삼오오 출발하기 시작했으나, 조선인 군부들 가운데 절반은 수류탄 1개씩을 받아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사마을 쪽으로 도망쳤다.

이수는 후루자마미 해변 가까이에 있는 특공정 은닉호에 몸을 피해 있다가 2중대 병사들이 이동을 하고 나면 반도코루산으로 올라가 우타를 찾기로 했다.우타는 해상정진전대 의무반 소속이기 때문에 강요에 의해서라도 반도코루산 전대진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수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손형래 서영석 허승원 김세명 등 4명의 군부동지들과 함께 후루자마미 5번 은닉호로 들어갔다. 다행히 은닉호안엔 특공대원이 아무도 없어서 마루레 뒤편에 숨었다.

그런데 잠시 뒤 이 호안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한 특공대원이 전투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호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수와 동지들을 쳐다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야!...너희들 여기 잘 들어왔다. 이 배가 나의 특공정인데 지금 당장 밖으로 밀어내주라!”

이수는 그 특공대원이 자결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가 자결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가까이 가서 말렸다. 근데 그는 오히려 권총을 뽑아들더니 빨리 특공정을 밀어내주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닌가.

다섯 사람이 힘을 합쳐 특공정을 모래사장으로 끌어내자 그는 배위에 올라가 차렷 자세로 정중하고 절도 있게 천황의 황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이수는 경례를 하고 있는 그에게로 달려가 마지막으로 설득했다.

“하사님, 자결하시면 안돼요. 부모님이 기다리잖아요!”

그러자 특공대원은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이수를 겨누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이수의 귀를 스쳤다.이수는 그를 포기하고, 온힘을 다해 은닉호 안으로 달려갔다. 250㎏의 폭뢰가 터지면 20m 근처에 있어도 흔적 없이 날라 가버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 그는 은닉호 안으로 뛰어들며 고함쳤다.

“안으로 뛰어!, 고개 내밀면 죽어!”

이수의 고함소리에도 허승원과 김세명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쑥 내민 채 특공대원이 하는 짓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굉장한 폭음과 함께 모래 폭풍이 동굴 안으로 휘몰아쳤다.

이수는 폭발하는 공압에 질식해 의식을 잃었다. 한참 뒤 깨어나 머리와 등에 뒤덮인 모래를 털어내며 보니까 손형래와 서영석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은닉호 앞에 있던 허승원과 김세명이 보이지 않았다.

이수와 손형래가 동굴 앞으로 가서 모래를 들추어내자 허승원과 김세명의 목 위 부분이 흔적 없이 날라 가버렸다. 이들 두 사람은 정말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구축함도 날려버릴 수 있는 괴력을 가진 폭뢰가 바로 동굴 앞에서 터지는 바람에 폭뢰 터진 자리는 모래만 움푹 파져 있고, 마루레와 특공대원도 가루가 되어 바닷바람에 먼지로 흩어졌다.

이수는 손형래와 서영석과 함께 벙커를 파는 작업 때 쓰던 삽을 가져와 두 사람의 시체를 바쁘게 묻은 뒤 삽을 모래사장에 던져 버리고 아리랑고개 쪽으로 도망쳤다. 폭뢰가 터지는 소리를 듣고 미군들이 어김없이 공격해올 것 같아서였다.

이수는 손형래와 서영석에게 왼손으로 아리랑고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 우리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여기서부터 두 사람은 일본군을 피해 저기 왼쪽 아리랑고개를 넘어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 안에 미군 막사가 보일 거다. 거기 가서 양손을 들고 투항해라.”

“형님, 미국 놈들이 진짜 우리를 살려주겠습니까?”

“무슨 얘기야, 미군이 포로를 쏴 죽인다는 건 일본 놈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살고 싶으면 무조건 내말대로 해라.”

“형님도 같이 안 갈 겁니까?...우리는 영어를 할 줄 몰라서...”

“영어 못해도 산다!.. 두 손을 들고 코리언, 코리언 이라고 외치면 된다. 나도 내일 투항할건데, 지금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 아사마을 쪽으로 먼저 간다!”

이수는 머뭇거리며 서있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크게 고함쳤다.

“영어를 못해도 괜찮다...겁내지 말고, 두 손 들고 무조건 ‘코리언’이라고 외쳐라!”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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