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저녁에도 이수는 우메자와 전대장의 명령에 따라 간자산 봉우리에서 후루자마미 해안과 자마미 마을 해안을 관찰했다. 날이 저물자 별안간 야카비섬 동쪽에 떠있던 미군 전함들이 수백 줄기의 빛을 번쩍이며 함포를 쏘아 올렸다.

함선을 떠난 포탄들은 곡선을 그리더니 황당하게도 자마미 민가로 우루루 쏟아지는 게 아닌가. 마을엔 군사시설이 하나도 없는데도 저렇게 어마어마한 화력을 마구잡이로 쏟아 붓다니.

별안간 마을 전체가 한꺼번에 폭발하며 불줄기를 튕겨 올렸고, 기와지붕과 돌담들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파열음 속에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수는 당황하며 망원경으로 마을을 살폈다. 부엌일 하던 여자가 옷에 옮아붙은 불을 끄려고 마당에 뒹굴었고, 어린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집밖으로 도망치다 골목에서 폭 꼬부라졌다.

두 번째 함포사격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타의 집으로 쏟아졌다. 우타의 사랑채가 불꽃을 튀기며 한 순간에 반 토막 나더니 이어 남아있던 나머지 토막도 힘없이 쓰러지며 불길에 휩싸였다.  망원경에 양 눈을 집어넣고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우타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2월 오키나와 본도로 떠난 고자와 기지대장이 우타의 집에 머물 때 총기보관 및 공습대비를 위해 창고 지하에 단단한 벙커를 만들어놓았는데, 이수는 지금 우타가 그 지하벙커로 피신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미군의 함포공격이 계속 되는 사이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두 차례나 폭발음이 들렸다. 이수는 다시 망원경을 집어 들고 폭발음이 들리는 시루해안 쪽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 폭발음은 미군의 함포사격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망원경으로 주의를 기울여 보니 시루해안 위쪽, 그러니까 ‘보석동굴’이 있는 지점쯤에서 폭발에 의한 희뿌연 먼지가 해변 쪽으로 몰려가는 게 관찰되었기 때문.

누군가가 ‘보석동굴’을 막기 위해 입구를 폭파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함포사격에 때를 맞춰 동굴입구를 막아버린 걸 보면 11선박단장의 특명을 받은 장교가 자마미에 남아 있다가 미군의 함포사격을 틈타 동굴입구를 폭파해 입구를 막아버린 게 틀림이 없었다.

첫 함포사격을 한지 30분 쯤 지났을 때 이수는 더 이상 산봉우리에서 방관할 수만 없다는 판단이 섰다. 보석동굴에 신경을 쓸 게 아니라, 느닷없이 미군의 폭격을 받은 우타와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직 함포사격이 멈추진 않았지만 이수는 바닷가로 달려 내려가 며칠 전 묻어두었던 양귀비 봉지와 코카인 봉지를 찾아내 서로 묶어 어께에 메고 하타키지 숲길을 지나 우타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은 돌담이 부서져 골목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고 집들은 형채도 없이 시커멓게 타다 남은 나무기둥과 돌멩이로 변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그래도 이수는 우타네집 벙커를 찾아내야 했다. 한 순간 불안감이 엄습하는 바람에 몸이 산산이 폭발할 것 같았지만, 다행히 여기 저기 기왓장과 돌멩이를 걷어내지하로 통하는 출구를 찾아냈다.

지하실에 들어서자 그곳은 '지옥'이었다. 7~8명의 부상자가 촛불 하나 뿐인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우타의 하얗던 간호복은 팔과 가슴에 온통 검붉은 피투성이였다.

“아, 이수씨, 큰일 났어요. 진통제가 모자라...환자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이수씨, 좀 도와주세요.”

“의무병들은 다 어디 갔어?”

“의무병들은 군인들을 따라 가버렸어요. 정비중대벙커와 반도쿠루산 진지로 이동했죠. 여긴 우리 마을 여자들뿐이에요.”

“저런....우타, 혹시 여기 작은 절구통 없어?”

“절구통요?...잠시만요. 제가 찾아볼 게요”

우타는 절구통을 뭐에 쓸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후닥닥 밖으로 나가 작은 나무 절구통을 하나 찾아왔다. 이수는 메고 온 자루에 든 양귀비 유액 덩어리 일부를 절구통에 털어 넣고 잘근잘근 부수었다.

일단 이 지옥 같은 신음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모르핀 성분이 들어있는 양귀비를 갈아 먹여야겠다는 판단에서 먼저 양귀비 진액을 가루로 만든 뒤, 이 가루를 10여개의 조각종이에 나누어 싸서 접었다.

“우타, 이 종이에 싸인 가루약을 모든 환자에게 하나씩 나누어줘. 물과 함께 마시도록 해. 저기 양팔 다 다친 부인에게 먼저 두 봉지를 입에 털어 넣은 뒤 물을 마시게 하고...”

“이수씨, 이게 뭔데요?”

“모르핀 원료인데, 일단 환자들에게 나눠준 뒤 효과가 어떤지 살펴봐야겠어.”
이수는 또 다른 봉지에 들어있는 코카인을 꺼냈다. 피곤에 지친 우타와 나눠먹기 위해서였다.

근데 자루에 손을 집어넣어 코카인을 꺼내는데 이수의 손가락 끝에 금속물질이 하나 걸려들었다. 손가락을 더듬어 꺼내보니 그건 반지였는데, 언뜻 봐도 이건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이수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바지주머니에 그 반지를 집어넣었다. 보석동굴에서 코카인을 꺼내올 때 반지 하나가 우연히 묻어들어 온 것이다.

이수는 코카인을 가루로 만들면서 먼저 자신도 입안으로 가루를 조금 흡입했다. 코카인 덕택에 5분정도 지나자 머리가 맑아지고 모든 판단이 명료해져왔다.

“우타, 당신,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쳤을 텐데 이 코카인 가루 좀 먹어봐”

우타도 정말 지쳤는지 이수가 건네준 코카인 2인분을 한 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잠시 후 지하벙커 안에 기적이 일어났다. 일시에 신음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한 것.오른팔이 부러져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내던 우타의 옆집 아주머니도 큰 숨을 몰아쉬었다.

“아, 좀 살 것 같네...저 의사선생님, 정말 신통하시네요.”

그 부인은 간호사인 우타에게 지시를 하는 걸로 봐서 이수가 당연히 의사인줄 알았다. 우타가 그 부인에게 다가가 부인의 팔을 고정하기 시작했다.조금 전만 해도 그 아주머니는 고통 때문에 너무 설쳐대 오른쪽 팔을 지지대로 고정시킬 수 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머니의 팔을 완전히 고정시켜줄 수 있게 되었다.

“미야코 아주머니, 사실 이분은 저의 남편이에요. 나하에서 결혼을 했는데, 자마미 마을사람들에게 혼인잔치를 하려고 했지만 전쟁 때문에 못했습니다.”

“그래? 아이고, 그래!...아,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신랑이 참 잘도 생겼네!”

이수는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엎드리며 큰절을 한번 하고 일어서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격려했다.

“아주머니, 요즘 군인과 마을 어른들이 영미귀축이 상륙해오면 모든 여자들을 강간하고 사지를 찢어 죽인다고 그러죠?... 그거 새카만 거짓말입니다. 부상을 입었더라도 절대 자결하지 마세요. 미군에게 항복을 하면 좋은 약으로 금방 치료를 해줄 겁니다.”

“아니, 의사선생님, 그런 말씀하시면 일본군인들한테 총살당해요.”

“잘 압니다......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이수는 더 이상 아주머니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부대에 복귀해야 할 시간이 지나서다.

“우타, 내가 당신을 더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지금 부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탈영병으로 몰리게 돼...나는 일단 부대로 복귀할게....”

“네, 이수씨, 몸조심해요.... 알았죠?”

“응, 알았어... 우타 함포사격이 계속되면 이 벙커도 위험해. 그러니까 일단 아까 내가 건네준 가루약을 잘 간수해서 함포사격이 그치면 여기 계신 아주머니들과 함께 마을 위에 있는 방공호로 이동하도록 해.”

“그렇게 할게요...근데 이수씨, 미군이 상륙해오면 우린 어디서 만나죠?”

“일단 우메자와 전대장을 따라가. 그래야만 내가 당신을 찾을 수 있어”

“이수씨, 전대장을 따라가더라도 산에서 흩어지면 서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너무 걱정돼요!”

“우타, 그런 걱정 하지마...전에 내가 얘기했지만 우리는 하늘이 마련해준 보이지 않는 빨간 끈으로 이어져 있어...그 끈을 잡아당기면 결국 만날 수 있게 돼”

우타는 피에 젖은 양팔로 이수를 껴안았다. 이수는 다시 코카인과 양귀비를 챙겨 어깨에 멘 뒤 우타의 피묻은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큰 소리로 마을여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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