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는 잠시 쉬고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려 제자리 앉아있기가 거북했는데, 그의 두근거림은 불안, 두려움, 꺼림칙함에 의한 게 아니었다.
단지 조금 전 발견한 그 은닉호에 ‘식물의 씨앗’이 들어있다니까 너무 기대에 차고 흥분돼, 심장 박동이 자신의 귀에 자꾸 들릴 정도였다.
그의 몸속에 내재되어있던 강한 식물학적 ‘끌림’이 그의 의욕을 이끌었고, 그는 그 끌림에 거부하거나 항거할 수 없었다.

이치가와 중대장이 그 땅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눈을 부릅뜨며 섬뜩하게 경고했음에도, 그 ‘끌림’은 이수의 통제력을 부수고 나와 머릿속을 세게 휘저었으며, 잠들지 못하게 했고, 숨 막히게 했다.
땅굴 안 암흑 속에 숨겨진 씨앗들이 질러대는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이번 일에 휘말려 목숨을 잃더라도, 그 동굴 안에 들어있는 식물씨앗들은 구출하고 말겠다는 각오가 솟아올랐다.
그는 오늘 밤사이 어떤 일이 있어도 전략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시루언덕의 땅굴로 몰래 들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희귀씨앗을 몇 알이라도 습득해오기로 결단을 내렸다.

물론 이 씨앗들이 싱가포르 말레이 보루네오 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에서 온 식물이라면, 그게 ‘마약’일 가능성도 있지만, 생명을 구하는 약재로 쓰일만한 씨앗과 뿌리도 틀림없이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면서 화교들이 모아놓은 금괴 보석과 함께 마약도 대량으로 확보해와 오키나와인이나 조선인들을 전쟁터에 밀어 넣는데 활용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중국의 아편전쟁 때처럼 마약은 한 나라의 백성을 총알 없이 서서히 파멸시킬 수도 있으니까, 이런 사태를 막아야 하겠다는 판단도 섰다.

이수는 새벽 3시쯤 소리 나지 않게 막사를 기어 나와 얼굴에 숯 칠을 하고 살금살금 기어 시루언덕으로 향했다. 다행이 오늘은 새벽바람이 심하게 불어 풀잎들이 요란하게 움직이면서 발발거리는 소리를 내는 덕분에 이수의 발자국 소리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만일, 목숨을 위협받을 상황에 대비해 평소 챙기지 않던 군도를 허리에 차고, 씨앗상자를 열어볼 수 있는 펜치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씨앗을 담을 수 있는 빈주머니 2개도 챙겼다.
은닉호 앞에 다다른 이수는 바위 뒤에서 한 참 숨죽인 채 동굴 쪽을 살폈지만 그 안엔 어떤 불빛도 없었다.

이수는 주먹 절반크기의 돌멩이를 잡아 2번이나 동굴 안으로 던졌지만 동굴 속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마 이곳은 극비동굴이어서 보초를 세우면 의심을 받을까봐 보초를 세우지 않고 원거리에서 초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수는 허리를 굽히고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옮기며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는데 그 안은 깜깜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식물이 줄기를 뻗어나가듯 촉감에만 의존해 동굴 벽을 더듬으면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약 8m쯤 들어갔을 때 왼손에 두꺼운 나무상자가 만져졌는데, 이 상자는 한두 개가 아니라 적어도 수십 개가 정돈된 채 어른 키 높이 보다 조금 높게 차곡차곡 쌓여져있었다.

그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쉽게 눈치 채지 못할 만한 나무상자를 하나 골라 펜치로 못을 뽑은 다음 군도로 상자옆구리를 뜯었다.
앞쪽 상자는 예상했던 대로 양귀비 씨앗이 주룩 쏟아졌다. 그런데 그 알맹이들을 손으로 집어보니 이건 양귀비 씨앗이 아니라 양귀비 씨앗의 유액을 채집해 손으로 만든 알맹이였다.
이 정도의 유액 알맹이라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중독 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옆 상자를 뜯어봤다. 이번엔 각성제로 쓰이는 코카인 가루 봉지가 손아귀에 들어왔는데 그 가루는 반 가공 상태인 코카인이었다. 또 다른 상자들에는 코카인 잎사귀들이 가득 가득 담겨있었다.

이수는 일단 코카인 가루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 넣고 침을 삼켰다. 코카인 덕에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자 그는 욕심이 생겼다.
지금 후루자마미 해안에서 곡괭이로 매일 은닉호를 파느라,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군부 동지들에게 이 빻은 코카인 이파리를 조금씩 나눠줘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카인 기운이 온몸에 완전히 퍼지자 그는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고, 어둠에서도 뛰어난 공간지각을 발동했다.
이수는 눈을 감고서 동굴 안을 구석구석 뒤지면서 동굴안의 크기와 나무상자들을 쌓아둔 구조를 익혔는데, 동굴은 자마미에 흔히 있는 자연동굴 ‘가마’로 밑바탕이 약 5m넓이이며 동굴의 양옆으로 상자를 쌓아놓고 중앙은 좁은 통로를 만들어 상자에 든 물건을 찾아 이동하기 편하도록 되어있었다.

“코카인 잎을 저장하는데 이렇게 긴 터널이 필요한가?”

이수는 일본군이 오키나와 나고(名護) 근처에 조선인 군부들을 동원해 대규모의 농장에서 코카인을 재배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단지 그 코카인 잎을 숨기는데 이런 단단한 나무상자를 활용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뭔가 의구심이 들어 이수는 아까 뜯어봤던 상자 속안으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는데 상자 안엔 코카 잎사귀만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이수의 손안에 이파리에 섞여 잡히는 물건이 있어 꺼내보니 보석으로 된 목걸이와 팔찌였다.
다시 옆 상자에 손을 깊이 집어넣었다. 이번엔 씨앗 속에서 촛대, 조각상, 벽걸이, 장식품 등 갖가지 보석 가공품들이 다 들어있었다. 더 안쪽으로 걸어가 또 다른 나무상자를 따봤는데도 거기에도 여전히 보석들이 이어졌다.

“아, 이게 바로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부자들로부터 빼앗은 보석들이구나!”

이수는 이게 얼마 전 우타네 집에서 우메자와 전대장과 이치카와 중대장이 얘기했던 거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생각을 했다.
싱가포르에서 영국인과 중국인 부자들을 살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많은 재물을 압수했다고 했는데 이게 바로 그때 빼앗은 보석들이란 걸 직감했다.

[살짝 손으로 가린 보석목걸이...이런 걸 빼앗으면 절대 안 됨...사진=이파]

이수의 타고난 촉감으로 판단할 때 이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가넷, 오팔, 에메랄드, 진주 등을 가공한 보석들이었으며,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크기의 수정 및 다이아몬드의 원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불상이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제기들도 함께 들어있는 걸로 봐서 중국인 영국인 이외에 인도네시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등 아시아지역의 궁전, 신전, 사찰, 예배당, 박물관, 기념관 등에서 일본군이 강제로 탈취하거나 몰래 빼돌린 역사유물들도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보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수는 일단 준비해온 2개의 주머니에 코카인과 양귀비 유액 알맹이를 채워 넣고 상자의 뜯어낸 흔적을 없앤 뒤 동굴입구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 나왔다.

너무 오랫동안 캄캄한 동굴 안에 거의 눈뜨지 않은 상태로 행동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 아직 여명이 제대로 오지 않았는데도 도카시키섬과 아무로섬의 능선이 환히 드러나 보였다.
이때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 사이에 총을 멘 일본 병사 한 사람이 올라왔다. 이수는 걸음걸이만 보고서도 그게 누군지 알았다.

“어?, 저건 나카타 하사잖아. 저 놈이 이렇게 부지런할 때도 있나. 허구한 날 늦잠만 자던 사내가 이런 새벽에 이 험한 곳까지 올라오다니...”

이수는 갑자기 지금까지 나카타의 게으름은 일종의 ‘변장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사실 누구도 그가 정보하사가 되어 돌아올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거였으니까.
어쨌든 이 자마미섬에서 바로 이 동굴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나카타 뿐일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가 오키나와 본도 제 32군 사령부 소속 방첩대에 정보교육을 받으러 가기 이전부터 그는 방첩대 소속이었을는지도 몰랐다.

이치카와 중대장이 나카타를 싫어하면서도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지 못한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저 나카타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할 것임에 여지가 없었다.

그와 직접 대항하기엔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았다. 그는 ‘야마타 사망사건’ 이후 이수를 어떻게든 첩자혐의로 체포해 총살시킬 궁리를 짜고 있다는 걸 이미 우메자와 전대장으로부터 전해 듣고 있었으니까.

이수는 나카타가 틀림없이 보석동굴로 들어갈 것이라고 판단하고 약간 오른쪽인 하타키지 숲길을 통해 해안으로 내려가기 위해 바위 뒤에 숨었다.
현재로선 깜깜한 땅굴 속에 있던 이수가 나카타보다 눈이 더 잘 보이니까 그의 행동을 몰래 살필 수 있었다.

나카타는 동굴 입구에 가서 몸을 낮추고 한차례 사방을 살피더니 잽싸게 동굴 안으로 쏙 사라졌다.
그 사이 이수는 혼신을 다해 해안으로 달려 내려가 숲이 끝나기 직전 둔덕 아래에 군도를 이용해 삵처럼 빠른 속도로 구덩이를 파고 가져온 주머니 2개를 파묻은 위 돌멩이와 나뭇가지로 위장했다.

그는 군부들의 세수시간에 맞추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걸어가 시루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손으로 움켜쥐어 숯 칠한 얼굴을 바닷물과 가는 모래로 빡빡 문질러 닦아냈다. 파도에 얼굴을 씻는 동안 어느새 동녘이 밝아왔다.
이수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들로 가득 찬 동굴을 발견했는데도 보석에 대한 욕심이 전혀 생기지 않고, 전혀 들뜨지도 않는 자기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난...천생이 식물학자인가 봐......그렇지만 저 보석과 마약을 일본군이 전쟁확대 수단으로 쓰진 못하도록 막아야 할 텐데...”

[자마미섬 시루해안...왼쪽 언덕위에 보석동굴이 있었다...사진=이파]

그는 얼굴을 통째로 바닷물에 집어넣었다. 바닷물에 얼굴을 씻으면 바닷물의 소금기가 피부를 팽팽하게 당기는데 그는 이 당김의 맛을 즐겼다. 드디어 팽팽해진 이수의 얼굴에 아침 햇살이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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