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통찰력의 비밀

입력 2012-11-27 12:20 수정 2012-11-29 11:13


지난 10월 5일은 스티브 잡스가 타계한 지 1주기 되는 날이다. 그의 추모행사가 5일 쿠퍼티노 시빅 센터에서 열렸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쿠퍼티노 시의회였다.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잡스 사후 1주기 소회를 묻는 언론 인터뷰에서 “애플은 최근 간담을 서늘케 하는 제품이나 카테고리를 내놓은 적이 없다”며 “잡스가 없다는 이유로 혁신 없이 원래 존재했던 시장에 그냥 섞이는 것은 애플을 위한 건설적인 방안이 아니다”라고 쓴 소리를 던졌다.  

창의력은 청년 시기 지식과 경험의 총합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에 대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창의’와 ‘통찰’의 원천일 것이다. 내게 성공을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을 묻는다면 단연 ‘생각의 힘’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삶의 과정은 ‘판단’과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발생 가능한 위험(risk)을 최소화 하고, 정확한 해답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생각’이라는 프레임을 거쳐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통찰력도 마치 절대 에너지 같은 궁극(窮極)의 ‘생각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생각의 힘’ 세기가 강할수록 ‘학업, 취업, 업무, 커리어, 결혼, 인생 2막’등 인생의 매우 중요한 단계와 변곡점에서 최적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을 배우고 통찰력을 얻고자 하면 책 속의 문자에 매몰되지 말고 그 너머 잡스의 내면을 만나고 궁극적으로 그와 합일되도록 노력하면 창의력과 통찰력에 대한 비밀의 문에 다가갈 수 있다. 가능하면 의도적이라도 나와 잡스가 하나가 되도록 반복 노력하면 그 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대학시절 이후 지금까지 ‘노자, 조식, 경허’ 등과 같은 큰 스승들을 만났다. 필자는 고전을 공부할 때 원전 해석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실행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성현이 현존해서 설명해 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가운데 역사적인 사실(fact)을 제외하고는 원전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귀감이 될 만한 구절이 있으면 마음에 담아놓고 삶에 스며들고 구현되도록 노력했다. 노자를 공부한다면, 노자의 원형을 반추하면서 최대한 그가 되도록 성심을 다했고, 내가 노자가 되는 그런 경지를 원했다. 돌아보면 사람들이 성현의 문자만을 취하고 길(道)을 가기 꺼렸던 것은 지난(至難)한 과정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취지는 알지만 어렵고 귀찮고 당장 유형의 유익을 주지 않기에 그렇다. 중요한 점은 이 지점에서 ‘생각의 힘’의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인생의 필살기는 ‘생각의 힘’이 중요하고, 그것을 얻는 첫 관문으로 롤 모델 또는 스승으로 생각하는 인물과의 전인격적 합일을 강조했다. 두 번째는 방법론적인 문제인데, 해당 인물의 일생에서 어느 시기를 중심으로 차용하고 전개하느냐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필자가 판단할 때 창의력이 무한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에서 청년시기’의 ‘지식 습득’과 ‘체험’의 축적량이 평생 창의력의 보고(寶庫)가 되고 통찰력의 근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관문은 스티브 잡스를 롤 모델로 정할 경우 그의 청소년과 청년시기의 지식 습득과 체험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잡스의 창의와 통찰력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청소년 시기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이름 없는 아기’의 엄마는 아기의 법적 양육권을 폴과 클라라 부부에게 넘겼다. 그들은 10년 동안 아기를 낳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임신을 포기한 상태였다. 

20세기 중반 이전에는 입양이 지금보다 훨씬 흔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여자 혼자 자녀를 키우는 일이 치욕이었다. 또 낙태는 불법이었고 낙태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기 쉬웠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낳은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잡스의 십대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생활이 너무 따분했다. 난 다루기 힘든 골칫거리로 변해갔다.” 그러나 잡스는 시도 끼적거리고 기타도 퉁겼으며 밥 딜런(Bob Dylan)의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또한 전기 콘센트에 머리핀을 쑤셔 넣다가 손을 데었고, 친구와 함께 개미약병으로 모형 화학연구소를 짓다가 위를 세척하기도 했다. 

그는 4학년 교사 이모진 테디 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 삶의 성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4학년 상급반을 가르치셨는데, 한 달 만에 나를 굴복시켰다. ‘숙제를 다 하면 5달러 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게 미끼를 던지셨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열정을 일으켰다.” 그 해는 잡스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가장 많은 것을 배운 해였다. 

잡스의 6학년 성적표에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적혀 있었다. “잡스는 뛰어난 독서가다. 하지만 독서를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잡스는 공부에 의욕을 갖거나 목적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때로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스티브 잡스는 1968년에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은 실리콘 밸리까지 들이닥친 전후의 경기부흥을 틈타 급히 세워진 학교였다. 1968년은 미국 전체에 격동이 몰아친 해였다. 베트남전과 시민권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면서 국가 기반이 흔들렸고, 대학들은 집회와 시위, 폭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아버지 폴 잡스는 전자공학보다 자동차에 훨씬 흥미를 느꼈다. 토요일 아침이면 자동차 폐품처리장을 돌아다니며 폐기물을 분류했다. 그는 그곳에 아들 잡스를 데리고 가서 계산대에서 이루어지는 ‘협상’과 ‘교섭과정’을 지켜보게 했다. 잡스의 아버지는 캐비닛이나 울타리 같은 것을 만들 때에는 숨겨져 잘 안 보이는 뒤쪽도 잘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는 일을 제대로 하는 걸 철칙으로 여기셨지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말이에요.” 

아버지는 자동차를 통해 그를 처음으로 전자공학을 접하게 주었다. “전자공학에 대해 심도 있게 이해했던 건 아니지만, 자동차를 비롯해 이것저것 고치다 보니 빈번하게 접하셨지요. 아버지는 내게 전자공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셨고, 저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어요.” 

잡스는 주말에 홀티드 스페셜티즈(Halted Specialties)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최신 반도체 칩에서 측정기까지 다양한 부품에 대한 가격과 시세를 알게 되었다. 한번은 잡스와 그의 친구 워즈니악이 어느 토요일 아침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잡스는 트랜지스터 몇 개를 사서 나중에 홀티드의 상사에게 이윤을 남기고 되팔곤 했다. 워즈니악은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보기엔 엉뚱한 생각인 것 같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항상 저 자신이 인문학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자공학도 무척 맘에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영웅 중 한 명인 폴라로이드사의 에드윈 랜드가 한 말을 읽었어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지요.” 

잡스의 생활에는 전자공학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잡스는 고등학교 2~3학년 동안 지적으로도 꽃을 피웠다. 전자공학에 광적으로 빠져있는 부류와, 문학과 창작에 몰두하는 부류의 교차점에 선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음악을 많이 듣기 시작했고 과학이나 기술 분야는 물론이고 그 밖의 책들도 더 많이 읽기 시작했어요. 셰익스피어와 플라톤 등을 읽었는데, 특히 <리어왕>이 좋았어요. 그는 좋아했던 다른 문학작품으로 <모비딕>과 딜러 토마스의 시를 꼽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잡스는 밀밭에서 처음으로 환각제를 경험했다. “갑자기 밀밭이 바흐를 연주했다. 정말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밀밭에 가득 울리는 바흐 음악을 듣다 보니 마치 내가 지휘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잡스는 후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에 대해 “젊었을 때 마약이나 히피문화에 한번이라도 심취했더라면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환각제를 경험했던 이유는 유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이유에서였다. 

잡스는 한 주에 두세 번씩 실리콘 밸리를 떠나 버클리를 찾아갔다. 그 곳을 돌아다니면서 실리콘 밸리에서는 접하기 힘든 ‘생각, 풍습, 사람’들을 지켜보며 이곳에서 성행하던 히피문화에 매료되었다. 곧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던 잡스에게 버클리에서 본 것은 대학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학 생활과 자유로운 영혼의 추구

잡스가 선택한 대학은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였다. 이곳은 작은 규모의 인문대학으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및 개성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학교로 유명했다. 고등학교에서 적응 못하던 학생들도 이곳에서 만큼은 만족감을 느낄 정도였다. 잡스의 첫 학기 성적은 형편없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인 자기 성격대로 곧장 학업을 포기했다. 그런데도 캠퍼스에는 남아 있었다.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리드 대학교는 이런 상황에 별반 개의치 않았다. 

대학 시절에 대한 잡스의 회상은 자신의 판단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준다. “6개월 동안 다녔는데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려면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몽땅 쏟아 부어야 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어요.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잡스가 리드 대학교에 입학한 후 영성과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책들에 깊이 심취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책이 바바 람 다스(본명 리처드 앨퍼트)가 쓴 <지금 이곳에 존재하라>였다. 잡스는 도서관에 다니며 선에 관한 책들을 파고 들었다.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 파라 마한사 요가난다의 <어느 요가 수행자의 자서전>, 리처드 모리스 벅의 <우주 의식>, 초감 트룽파의 <마음 공부> 등이 그것이다.  

동양 종교, 특히 선불교에 대한 잡스의 관심은 단지 한때의 흥미니 젊은 시절의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특유의 열성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결국 자신의 인성 깊은 곳에 뿌리 내리게 했다. “잡스는 선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에 받은 영향이 더욱 깊어진 거지요. 그의 모든 접근 방식은 순전한 미니멀리즘 미학과 강렬한 집중이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데, 그게 다 선에서 얻은 겁니다.” 잡스는 또한 불교에서 강조하는 직관적 통찰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직관적 이해와 자각이 추상적 사고와 지적 분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잡스는 이내 대학교가 지겨워졌다. 대학 생활은 좋았지만, 필수과목들을 이수해야 한다는 점이 싫었다. 그는 마음이 끌리지 않는 수업은 거부하고 원하는 수업에만 들어갔다. 잡스는 리드 대학교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등록금을 내는 것이나 싫은 수업을 듣는 것을 그만 두고 싶었을 뿐이다. 놀랍게도 대학 측은 그런 잡스를 용인해 주었다. 리드 대학교 학생과장 잭 더드먼의 증언이다. “그는 기계적으로 주입하는 진리를 거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더드먼은 등록금을 내지 않은 잡스가 수업을 청강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또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것도 허락했다. 

대학 중퇴 이후 잡스는 18개월 동안 히피들처럼 살았다. 친구의 기숙사에서 얹혀 지내고 콜라 병을 팔아 용돈을 벌었으며 일요일마다 크리슈나 사원까지 11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가 음식을 얻어먹었다. 겉보기엔 몹시 힘든 삶처럼 보였지만 잡스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언젠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잡스는 캠퍼스를 거닐다가 화려한 서체로 가득한 포스터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리드 대학교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 좁게는 ‘서예’를 이르고 넓게는 활자 이외의 모든 ‘서체’를 이른다) 강의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잡스는 즉시 그 강좌를 신청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중요한 결정이 되었다.  

“캘리그래피로 뭔가 쓸모 있는 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당시의 경험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컴퓨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부터 캘리그래피 기술을 적극 활용했으니 매킨토시는 그 기술을 적용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셈이죠. 만약 그 때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이처럼 다양하고 독특한 서체(font)를 개발해 내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매킨토시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애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플이 없으면 전 세계 소비자들이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구경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잡스는 캘리그래피에 관한 얘기를 2005년에 처음으로 꺼냈다. 캘리그래피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잡스가 어떻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지 또한 업무적, 개인적인 삶에서 어떻게 혁신을 창조해 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잡스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랐다.  

청년 잡스 인도로 떠나다 

1974년 봄 베트남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잡스는 리드 대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비디오게임업체 아타리(Atari)의 구인광고를 보고 별다른 기대 없이 회사를 찾아갔으나 즉시 채용되었다. 당시 그는 대학에서 중퇴한 열여덟 젊은이로 허름한 옷차림에 완전히 히피 행색이었다. 그래서 밤에만 근무하고 다른 직원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채용했다. 

어느 날 인사부장을 찾아가 힌두교 스승을 만나러 인도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 때 아타리사는 독일에서 출시한 게임에서 문제가 있었고 잡스가 인도에 가는 길에 독일에 들러 문제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인도여행은 친구 대니얼 코키와 동행했다. 

어느 날 우연히 산속에서 힌두교 구루(스승)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만났다. 잡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걷던 중에 종교행사 장면을 목격했다. 바바(힌두교의 영적스승) 주변을 많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맛있는 음식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나는 바바를 찾아가 존경의 예를 표하고 음식을 얻어먹었다. 음식을 먹고 있는 내게 갑자기 바바가 다가오더니 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팔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수백 명의 인도인들은 이 성자를 단 10초 동안 만이라도 보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왔지만, 나는 단지 먹을 것을 구하려다 그를 만났을 뿐이다. 30분 뒤에 산 정상에 올랐고 그 곳 작은 샘에서 내 머리를 물에 적시고 면도칼로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열아홉 살인 내가 이국의 히말라야에 왔을 뿐인데, 인도의 한 바바가 다른 사람들을 제쳐 두고 나를 꼭대기로 끌고 올라가 머리를 밀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대니얼 코키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야 인도에 도착했다. 그때쯤 잡스는 지혜를 나눠 줄 수 있는 구루를 찾으려 더는 애쓰지 않았다. 그 대신에 금욕적인 경험과 내핍생활, 단순성 등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했다. 

집으로 돌아 온 잡스는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경로 중 하나였다. 아침 시간과 저녁시간을 이용해 명상에 들어가거나 선을 공부했다. 동양사상과 힌두교, 선불교 등 깨달음에 대한 잡스의 관심은 단순히 열아홉 청춘이 잠시 보인 객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후 평생에 걸쳐 동양 사상의 많은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스티브 잡스는 인도 순례 경험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인도에 갔을 때보다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훨씬 더 커다란 문화적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지력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 대신 직관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관력은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보다 수준이 훨씬 높습니다. 제가 보기에 직관에는 대단히 강력한 힘이 있으며 지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깨달음은 제가 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구에서 중시하는 이성적인 사고는 인간의 본연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학습하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학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터득하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성 못지않게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직관과 경험적 지혜의 힘입니다.”  

선불교 등 동양사상에 심취한 잡스 

“인도에서 돌아온 이후 선불교는 제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 번은 일본의 영평사(永平寺)에 가 볼 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내 영적 스승이 그냥 이곳에 있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거라면 그곳에 가도 역시 구할 수 없을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이 옳았죠. 저는 선불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스승을 만나고자 세계를 돌아다니려 하지 말라. 당신의 스승은 지금 당신 곁에 있으니.” 

잡스는 미국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정신은 먼 땅에서 헤매고 있었다. 삭발한 머리에 노란색 법복을 입고 아타리로 돌아갔다. 회사는 복직을 허락했다. 아타리에서 일하는 시절에 명상 수련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잡스는 자신이 있는 로스앨터스에서 스승을 찾았다. <선심초심>의 저자이자 샌프란시스코 선 센타를 운영하던 스즈키 순류였다. 얼마 후 잡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더 깊은 가르침을 원하자, 스즈키는 자신의 수행 제자인 오토가와 코빈치노로 하여금 로스앨터스에 정식 선 센타를 열도록 지시했다. 잡스는 거의 매일 고분을 찾아가다시피 했고 몇 개월에 한 번씩은 그와 함께 명상 수련회에 참석했다. 잡스는 남은 인생을 선불교에 완전히 헌신하며 사는 문제에 관해 코분치노와 진지하게 상의해 보았지만, 코분치노는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선불교나 영적 생활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면서 말이다. 두 사람의 진실 된 관계는 그 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17년 후 코분치노는 잡스의 결혼식 주례를 맡는다. 

대니얼 코키는 이렇게 말했다. “잡스와 나는 선원 근처에 있는 코빈치노라는 선의 대가를 자주 찾았다. 잡스는 코빈 곁에서 몇 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스승의 비밀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는 능력에 있었는데 이것은 잡스에게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그의 경영스타일이 코빈에게 비롯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선 수행을 시작한 것은 애플을 세우기 1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코빈은 잡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유창하지 않은 영어지만 사업을 계속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곧 ‘사업이 선사(禪寺)에서 수련하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각이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세상의 부조리함을 이해할 방도와 마음 깊이 담아 둔 의문점의 해답을 찾고 있었던 잡스에게 선불교의 매력은 대단했다. 선불교는 수행자가 스스로 종교에 입문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안내자가 필요치 않았다. 선은 ‘직관’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면서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물리쳤다. 

잡스는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 수행자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애플’이었다. 1976년 애플을 공동 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은 잡스가 타계한 날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잡스가 공동체를 이뤄 경작되고 있었던 사과 농장을 방문한 뒤 ‘애플’이란 이름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애플의 시작은 두 명의 20대 청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애플을 설립했을 무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만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컴퓨터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플Ⅱ’라고 불렀죠. 애플Ⅱ는 모든 사람이 쉽게 사용하고 즐길 수 있는 컴퓨터였습니다.” 1980년 창립 4년 후 애플Ⅱ가 100만대 판매실적을 올렸다.  

인생은 퍼즐게임, 퍼즐수량 만큼 원하는 인생을 만든다 

스티브 잡스의 청소년 및 청년시기 삶의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그가 늘 강조한 그리고 애플의 핵심 경쟁력인 ‘직관(intuition), 집중(focus), 단순(simplicity)’의 비밀과 근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청년 시기 동안 잡스는 자기 영혼의 동요를 돌보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열중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멋진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역사의 흐름과 인간 의식의 흐름 속에 되돌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대학 때 잡스가 캘리그래피 수업을 들었던 이유는 단 하나,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잡스는 그 결정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따로 떨어져 있던 경험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아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잡스가 신(神)이 아닌 이상 자신의 미래를 선명하게 알 수 없다. 당시 행위와 실천이 그의 말대로 나중에 어떤 퍼즐의 조각이 될지도 몰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생의 퍼즐’ 즉 ‘경험’의 양이 적고 그 질이 낮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경험이 다채롭고 격이 높으면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입체적인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다.  

잡스는 애플에 복귀한 이후인 지난 12년의 세월이 신제품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그의 목표는 빌 휴렛과 그의 친구 데이비드 패커드가 이룩한 것과 동일한 업적을 쌓는 것이었다. 혁신적인 창의성이 충만하여 창업자들이 은퇴한 후에도 오랜 세월 존속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 말이다.  

전 세계 공동체들이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경제를 구축하려고 애쓰는 이 시대에, 스티브 잡스야 말로 독창성과 상상력, 지속 가능한 혁신의 궁극적 아이콘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21세기에 가치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과 창의성을 연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엔지니어링의 놀라운 재주에 상상력의 도약이 결합되는 회사를 세웠다.
한국적인 그리고 한국의 CEO 문화와 트렌드를 연구하는 한국CEO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영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CEO 커뮤니티인 다음카페 IamCEO의 대표시삽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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