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창업자 레이 크록의 성공 방정식

입력 2012-11-27 12:13 수정 2012-11-27 12:13


일상을 잘 살피면 성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경제가 어렵다 하지만 국민 간식 치킨 전문점의 창업은 성황이다. 치킨의 국내 시장규모는 5조원 이상이며, 전국에 5만여 개의 프랜차이즈 및 개인점포가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국민 간식이라면 햄버거를 빼놓을 수 없다. 비만을 촉진하고 건강을 해치는 ‘정크 푸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간단한 식사대용으로 무리가 없어 인기가 있다. 햄버거의 핵심 경쟁력이 빠른 시간 내에 신속하게 식사가 가능한 것이라면, 동일한 의미로 자동차, 세탁기, 청소기 등도 일상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최소화하는 편의성을 강조한 제품들이다. 인간 생활이 고도화 될수록 패스트푸드의 영향력이 상승되고 햄버거도 건강메뉴 출시 등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한 우리 일상에서 위치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맥도날드 제품은 글로벌 경제의 지표로도 활용된다. 일정 시점에서 미국 맥도날드 햄버거 제품인 빅맥 가격을 달러로 환산한 후 미국 내 가격과 비교한 ‘빅맥지수(Big Mac index)’를 살펴보면 각 국의 통화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글로벌 프랜차이즈 기업의 대명사가 된 맥도날드의 창업자는 레이 크록(Ray Kroc)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인 50대 초반에 창업을 시작해 세상을 떠난 82세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아 온 그의 인생여정을 조망한다. 그리고 레이 크록의 20대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30~40대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및 우리의 일제강점기 시기이며, 맥도날드를 창업한 1955년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은 격동기로 당시 미국과 한국의 경제 상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편 1979년 롯데리아는 국내 최초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도입해 패스트푸드 문화를 선보였고, 국내의 맥도날도 1호점은 1988년에 개점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세계적인 햄버거의 대명사는 맥도날드이다. 현재 120개 이상의 나라에서 30,000여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고, 하루에 전 세계 5,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맥도날드는 원래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가 개인 레스토랑으로 시작한 것을, 레이 크록이 권리 전체를 인수하여 1955년 4월 15일,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제1호 지점을 개장한다. 그 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레이 크록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소회한다. “행복을 빚어내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나는 늘 그렇게 믿었다. 1920년대 초, 일주일에 35달러를 받으며 종이컵을 팔고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연주해 아내와 딸아이를 먹여 살리던 그 시절부터 백만장자가 된 오늘날까지 언제나 그랬다. 또한 ‘사람은 눈앞에 나타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신조를 충실히 따르며 살아왔는데 이 역시 내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이 크록은 1902년 시카고의 경계 서쪽에 위치한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책읽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고, 사물에 대해 이것저것 궁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한 머릿속으로 갖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 상상할 때가 많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어떤 계획이 떠오르면 잔뜩 들떠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공상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공상은 늘 행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차리는 상상을 한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 상당량의 레모네이드를 팔았다. 기회만 생기면 어딘가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진정으로 즐겼던 것은 토론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고등학교 봄 학기가 끝날 무렵,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커피콩과 싸구려 장식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힘으로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레이 크록은 다시 학교에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에게는 전쟁이 학교보다 더 중요했고 그래서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적십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입대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입대하려면 나이를 속여야 했다. 그가 배속된 중대는 훈련을 받기 위해 코네티컷 주에 집결했는데, 그곳에는 레이 크록 말고도 나이를 속이고 입대한 병사가 또 한 명 있었다. 그 병사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막사 안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였다. 

자신을 판매하라 

1922년 레이 크록은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결혼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혼은 아직 무리라고 생각한다. 너는 우선 안정적인 직장부터 구해야 한다. 사환이나 호텔 벨보이 같은 것 말고 탄탄한 직장 말이다.” 며칠 뒤, 레이 크록은 릴리라는 브랜드의 종이컵 파는 일을 시작했다. “종이컵에 왜 마음이 끌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종이컵이 대단히 혁신적이고 장래성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종이컵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것이 앞으로 미국이 가야 할 길의 일부임을 감지했다.” 

이후 17년간 종이컵을 판매하는 동안 회사 내의 영업부문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레이 크록은 멀티믹서라는 6개의 회전축이 달린 밀크셰이크 제조기를 보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된 보수가 좋은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내 에셀이 한 마디 던졌다. “그 일은 하는 건 당신의 미래 전부를 위험한 도박에 거는 거야. 당신도 이제 서른다섯이야. 그런데 지금 와서 스무 살짜리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멀티믹서가 지금은 좋아 보이겠지. 하지만 만약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그의 굳은 의지는 새로운 도전을 결행하게 했다. 당시 사업이 번창한 비결을 직설적인 설득력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말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는 직설적인 접근법으로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지나치게 변죽을 울리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 설명한 다음 구매를 제안하면 고객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품 소개와 고객 설득을 잘해 놓고도 말을 멈춰야 할 결정적인 순간을 깨닫지 못해 판매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전국 각지에서 멀티믹서를 구입하려는 고객들의 전화가 쇄도할 즈음, 여러 곳의 레스토랑 주인들의 전화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의 맥도날드 형제들이 쓰는 것과 똑같은 믹서를 사고 싶소.” 그래서 1954년의 여름 어느 날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매장을 찾았다. 그는 첫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는 파리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레스토랑 안팎의 모든 것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했다. 평소 위생 관리가 허술한 레스토랑에 질색인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심지어 주차장에도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다 

193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의 외식 업계에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드라이브인 레스토랑(drive-in restaurant)’의 등장이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청망청 생활하기가 어려워지자 비교적 저렴하고 간편하게 외식을 할 수 있는 드라이브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가 샌버너디노에 문을 연 매장은 전형적인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이었다. 영업은 대성공이었으며 특히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은 레스토랑을 계속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졌다. 주차장이 언제나 가득 찼는데도 매상은 일정 수준 이상 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용단을 내렸다. 1948년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폐점한 그들은 얼마 후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운영 방식을 채택한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그것은 서비스와 메뉴를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모두 최소화한 레스토랑으로 훗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수많은 패스트푸드점의 원형이 되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조립생산라인 방식에 기초한 조리법으로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음료 등을 제조했다. 결과는 그들 형제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절차가 간소해지자 각 단계의 품질향상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들 형제의 성공비결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소박했다. “저기 널찍한 현관이 있는 하얀 집이 보이세요. 저기가 우리 형제의 집입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집이지요. 우리는 저녁이면 마당에 나와 해가 지는 것을 보기도 하고, 이 레스토랑을 내려다보기도 합니다. 평화로운 생활이지요. 우리는 지금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그게 우리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다른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해 새 매장을 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저는 멀티믹서를 팔면서 전국 각지의 수많은 레스토랑 주방을 가봤습니다. 하지만 이곳만큼 가능성을 지닌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런 매장을 몇 개 더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형제 중 한 사람이 반대의사를 밝혔다. “어려울 겁니다. 누가 우리 대신에 새 매장을 열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레이 크록은 강력한 확신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내가 하겠습니다.”  

1954년,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돌아오던 운명의 날에 그의 서류 가방에는 갓 서명한 맥도날드 형제와의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당뇨병에 관절염 증세도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갑상선 대부분과 담낭도 잃어 버렸다. 그는 결의에 차 있었다. “내 인생의 절정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하다 

신규 가맹점은 건축가가 골든 아치(Golden Arches)를 넣어 설계한 새 건물과 동일한 형태로 지어야 하며, 모두 맥도날드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1955년 4월 15일 마침내 디플레인스 매장을 개점했다. 수익은 처음부터 발생했지만 매장 운영이 매끄럽게 이루어지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고, 초반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영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임대료와 직원 봉급 등은 모두 멀티믹서 판매에서 생긴 수입으로 해결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출근해 영업 준비를 도왔다. 결코 교만을 부리지 않고 기꺼이 화장실 청소도 했다. 매장 주변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데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치우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루면서 당장 쓰레기를 치우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완벽함은 이루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맥도날드에서 원했던 것은 바로 그 완벽함이었다. 당시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초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렌치프라이(French fry potatoes)가 맛있게 조리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조리단계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뭔가 빠뜨린 것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실수는 없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프렌치프라이 조리과정을 보여주었을 때 기억해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 보았지만 프렌치프라이는 여전히 흐물흐물하고 맛이 없었다. 굉장히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레이 크록은 감자협회에 조언을 구했다. 그는 모든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협회 직원은 맥도날드 형제가 철망으로 만든 통에 감자를 담아 그늘에 보관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바로 그겁니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밭에서 캔 직후의 감자는 성분 대부분이 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분 함유량이 대단히 높은데, 이후 건조과정에서 당분이 녹말로 변하며 맛이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협회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인 건조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리고 협회에서 추천한 ‘데치기(blanching) 조리법’을 프렌치프라이 제조에 적용키로 했다. 이는 감자를 일단 끓는 기름에 한 차례 담갔다가 꺼낸 뒤 기름기가 빠지고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튀기는 방식이었다. 마침내 그의 기대에 만족할 만한 프렌치프라이가 나왔다. 

그는 맥도날드라는 이름 아래 단순히 매장을 개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일관된 높은 품질과 균일한 조리법을 특징으로 하는 레스토랑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운영자 한 사람 또는 매장 한 곳의 품질이 아닌 체계적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매장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결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당시 그의 운영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맥도날드 형제와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270만 달러를 지불하고 맥도날드 형제에게서 일체의 권리를 사들였다. 사업은 순항을 해서 6년 만에 원금을 상환했고, 1972년이 되어서는 채무를 완전히 정리했다.  

“푸르다는 것은 아직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완전히 성숙하면 그 때부터 부패하기 마련이다.” 레이 크록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의 굳은 초심은 사업 방침에도 영향을 주었다. “초창기에 결정해 오랜 세월 고수한 방침 중 하나는 매장에 공중전화, 주크박스, 자동판매기를 일절 들여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계를 설치해 부수입을 올리고자 했던 운영자들은 여러 차례 내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기계가 있으면 매장 내에 공연히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생겨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맥도날드에 부여하고자 한 가족적인 이미지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모든 매장 종업원은 강도 높은 교육 훈련을 받았고 맥도날드의 서비스 제공 방식을 철저히 습득해야 했다. 입지 조건이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 기본 요소만 충족하면 매장의 성공은 확실히 보장되었다. 전직 군인, 식료품점 점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맥도날드라는 이름 아래 매장운영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본기는 머리에서 갑자기 나와 저절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로 레이 크록은 기본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내가 만일 ‘QSC&V(품질quality, 서비스service, 청결cleanliness, 가치value)’라는 구절을 얘기할 때마다 바다에 벽돌을 하나씩 쌓았다면 아마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놓았을 것이다.” 

성공의 방정식 

그는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걸라고 강조했지만 한 편으로는 세부적인 철저함도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따금 한반 중에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포괄적이면서 완벽해 보이는 아이디어다. 하지만 다음 날 환한 햇빛 아래서 다시 생각해보면 간밤의 생각은 현실성이 부족한 공상에 가까운 계획이었음이 드러난다. 대개의 경우 그 이유는 필수적인 세부사항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세부를 좋아한다. 사업에 성공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그 기초를 형성하는 모든 세세한 부분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는 사업에 집중을 해서 큰 성과를 얻었다. 1976년에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다. 그는 사업에서 집중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하나님, 가족, 맥도날드를 믿는다. 하지만 회사에 있을 때는 이 순서가 정반대로 바뀐다. 100야드(약 91미터) 달리기를 하는 도중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승리하길 바란다면 경주에 집중해야 한다. 내게는 맥도날드가 바로 그런 경주다.”  

그의 뜨거운 열정은 경쟁사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경쟁업체의 운영 비밀을 알아내고 싶으면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지면 된다.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그 안에 들어있다. 나는 그런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새벽 2시에 경쟁사의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며 전날 고기를 몇 상자나 썼는지, 빵을 얼마나 썼는지 살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레이 크록의 사업에 대한 집중과 열정은 자연스럽게 강한 자신감으로 표출되었다. “이따금 경쟁업체가 우리 매장에 스파이를 보낼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어느 잘 나가는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우리 운영 매뉴얼을 입수했다. 이처럼 경쟁자가 내 계획을 훔칠 수도, 내 스타일을 모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까지 읽을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따라 잡으려 해봤자 나는 언제나 그들보다 몇 마일은 앞서갈 것이다.”  

레이 크록이 새로운 메뉴에 자꾸 관심을 보이면 중역들은 이렇게 말했다.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회사다. 그런데 왜 치킨을 팔 생각을 하는가?” “왜 성공적인 조합에 굳이 변화를 주려 하는가?” 하지만 그동안 메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로 추가한 빅맥(Big Mac), 에그 맥머핀(Egg McMuffin) 등의 메뉴가 크게 성공했다. 이들 메뉴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하나하나의 제품이 모두 운영자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즉, 회사는 시스템 내에서 매장 운영자들의 창의성에 도움을 받고, 그들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긍정적 이미지와 협동 광고 등을 통해 혜택을 받았다. 

레이 크록은 고객철학의 확립에 대한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사업의 본질에 대한 통찰도 곁들인다. “사업 하는 사람 중에서 꽤 많은 이들이 시야가 좁아 눈에 보이는 현금만 소득인 줄 안다. 하지만 사실 소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것은 고객의 얼굴에 비치는 만족스러운 미소다. 고객이 미소를 지었다는 것은 우리 매장을 다시 찾겠다는 뜻이다. 다음번에 그 고객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올 것이다. 새로운 고객이 생기는 것이다.”  

끈기와 의지를 품어라 

“온 힘을 다해 전념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1976년 3월 그가 다트머스 경영대학원의 학생들에게 전했던 말이다. 그들은 레이 크록에게 기업가가 되는 길, 즉 모험적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개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하지요.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과는 달라요. 그건 미친 짓이지요. 하지만 필요할 때가 되면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합당한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것은 도전의 일부이자 즐거움입니다.”  

그는 맥도날드의 성공담에 존재하는 핵심요소는 ‘타고난 재주나 교육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확고한 의지’라고 강조한다. 레이 크록은 그가 가장 좋아 하는 글을 소개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도전의식의 발현을 강조한다. “명심하라. 이 세상 그 무엇도 끈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재능을 타고 나도 소용없다. 재능이 있음에도 실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능력이 뛰어나도 소용없다. 능력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속담이 될 정도로 흔한 일이다. 교육을 받아도 소용없다. 이미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들로 가득하다. 오직 ‘끈기’와 ‘의지’가 있어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는 법이다.”  

필요할 때가 되면 전부를 걸어야 한다 

대부분 기업에서 총수가 다시 승진을 하는 경우, 그 자리는 명목상의 직위가 일반적이다. 레이 크록도 오가는 이야기를 듣다 자신의 의견을 구하는 경우에만 대답하는 역할에 만족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이나 부동산 취득에 관해서는 전면에 나섰다. 부동산 조사를 위해 개발한 컴퓨터가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에 출력되는 데이터는 그에게 거의 쓸모가 없었다. 가능성 있는 장소를 발견하면 차를 몰고 그 부근을 돌아본 다음, 길모퉁이의 술집이나 인근 슈퍼마켓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관찰한다. 그러면 앞으로 매장 영업을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힌다. 

레이 크록은 자서전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 만의 길을 가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내가 52세가 되어서야 맥도날드를 시작해 하루아침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놀라움을 표한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재능을 갈고닦다 갑작스레 다가온 좋은 기회를 잡아 성공하는 연예계 스타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 아침을 맞이하기 전까지 나는 30년이라는 길고도 긴 밤을 보냈다.” 맥도날도 본사 벽에는 이런 슬로건이 걸려 있다.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쇠퇴가 찾아온다.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심장마비로 인해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1984년 1월 14일 까지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를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일했다.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마지막 몇 년 동안조차 거의 날마다 사무실로 출근했다. 수석회장이었던 그는 새 가맹점이 문을 열 때마다 영업 첫 날의 판매 보고서를 받아 철저히 검토했으며, 경영진이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레이 크록은 진정한 행복은 성공의 결과이며, 성공은 리스크를 안더라도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한 최선의 길은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주는 것이다. 행복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행복은 성공의 부산물이다. 성공은 실패의 가능성을 딛고, 패배의 리스크를 딛고 이루어져야 한다. 평평한 바닥위에 놓인 로프 위를 걸어가는 것은 결코 성공이 아니다. 리스크가 없다면 성공에도 긍지가 있을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척자 정신에 입각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한국적인 그리고 한국의 CEO 문화와 트렌드를 연구하는 한국CEO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영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CEO 커뮤니티인 다음카페 IamCEO의 대표시삽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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