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아르튀르 랭보


야청빛 여름 저녁 들길을 걸으리.

밀잎 향기에 취해 풀을 밟으면

꿈꾸듯 발걸음은 가볍고

머리는 바람결에 신선하리.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한없는 사랑을 가슴에 가득 안고

보헤미안처럼 멀리 멀리 가리.

연인과 함께 가듯 자연 속으로.

 

조숙한 천재여서 그랬을까. 시인 랭보의 삶은 방랑과 기행의 연속이었다. 시에서도 파격과 생략, 난해한 문체를 마구 휘둘렀다. 어릴 때부터 반항아였다. 프랑스 북동부 아르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부터 라틴어 시를 쓸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어머니에게 반발해 툭하면 집을 나갔다. 거의 모든 규율에 반기를 들었고 청소년 티를 벗기도 전에 술독에 빠졌다.

16세 때 터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뒤로는 더 그랬다.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다가 무임승차 혐의로 체포돼 구치소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다 시인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를 계기로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 17세 때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기차역 장면으로 유명하다. 랭보는 파리의 기성 시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야심작 ‘취한 배’를 썼고 베를렌은 여기에 흠뻑 빠졌다. 둘의 관계는 문학을 넘어 동성애로 발전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정도 느껴보지 못한 랭보는 ‘금지된 사랑’에 탐닉했다. 베를렌은 랭보보다 더 집착했다. 결국 2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베를렌을 떠난 랭보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쓴 뒤 더 험한 방랑길에 올랐다. 세계 곳곳을 떠도는 동안 수많은 병에 걸려 고통 받았다. 에티오피아에선 무릎 종양으로 다리를 잘라야 했다. 그러고도 숱한 상처 속에 자신을 학대하다 37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베를렌이 붙여준 별명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처럼 그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았다. 시의 목적도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자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잡아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고행을 바탕으로 한 ‘견자(見者)의 시학’이 여기에서 나왔다.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로 현실 너머 세계를 끊임없이 찾으려 했던 ‘젊은 견자’ 랭보.

그가 이 시 ‘감각’에서 찾아 헤매는 것도 아직 가보지 못한 들길과 만나지 못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찾아 보헤미안처럼 멀리 가리라는 그의 염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으니, 안타까운 미완의 꿈이다.

눈여겨볼 것은 시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단어 ‘자연(La Nature)’을 대문자로 썼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것을 품은 대자연의 세계를 뜻한다. 보들레르 시 ‘교감’의 첫 구절 ‘자연은 신전’에 등장하는 그 대문자다. 보들레르 미학의 본질이 물질과 정신세계의 교감이었듯이, 랭보 시학의 뿌리가 이 두 세계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운율이 맛깔스러워서 낭송하기에도 좋은 시다.

그의 또 다른 시 ‘첫날밤(Première soirée)’을 함께 음미해 보자. ‘감각’과 겹쳐가며 읽으면 맛이 더 살아난다. 구태여 설명을 보탤 필요도 없다. 신혼부부 첫날밤을 뜻하는 순우리말 ‘꽃잠’의 느낌 그대로다.

      첫날밤(Première soirée)

-그녀는 아주 벗고 있었네.

버릇없는 커다란 나무들은 창가에

기웃거리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네.

짓궂게도, 가까이, 아주 가까이서.

 

커다란 내 의자에 반나체로

앉은 그녀, 팔짱을 끼고,

마루 위의 가느다란, 아주 가느다란

두 발은 기쁨으로 전율하네.

 

밀랍 빛이 되어 나는 보았네.

덤불 속 작은 햇살이

그녀의 미소 속에서, 가슴 위에서

팔락거리는 것을 -장미나무에 앉은 파리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에 나는 키스했네.

그녀는 맑은 트릴 음으로
부드럽고 꾸임 없이 웃었네.

예쁜 크리스탈 미소.

 

슈미즈 아래로 그녀의 작은 발이

달아났네. “그만 좀 해요!”

-첫 대담함이 허락되자

웃음으로 벌을 주는 체했네.

 

-내 입술 아래 꿈틀거리는 가여운

그녀의 눈에 나는 부드럽게 입 맞췄네.

-그녀는 깜찍스런 머리를 뒤로 젖히네.

“오, 더 좋은데요!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요.”

-나는 그녀 가슴에 나머지를 쏟아 부었네.

간절히 원하던 행복한 웃음으로

그녀를 웃게 한 입맞춤 속에서…

 

-그녀는 아주 벗고 있었네.

버릇없는 커다란 나무들은 창가에

기웃거리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네.

짓궂게도, 가까이, 아주 가까이서.
고두현/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거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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