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적은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상하게도 적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이런 적에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가까이 있는 적을 이기는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먼저 몸을 숨겨야 한다.
너무 가까워 몸을 숨길 수 없을 땐 마음을 숨겨야 한다. 다시 말해 ‘근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특공대원, 전원 마당으로 집합!!”

별안간 문밖에서 나카타 정보하사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우타네 안채에서 잔치를 벌이던 여학생들과 특공정 하사관들은 갑자기 벌떼를 만난 듯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음식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른 모자를 찾아 쓰며 단추를 잠그기 바쁘게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여학생들은 나카타의 날카로운 외침에 더 심하게 놀랐는데, 그중 우시와 하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흰자위를 넓게 드러내면서 경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부엌으로 도망쳤다.
이수도 나카타 하사와 마주치면 뭔가 트집 잡힐 것 같아 얼른 일어나 고양이 발걸음으로 방 안쪽에 있는 병풍 뒤에 숨어들었다. 나카타야말로 ‘가까이에 있는 적’이어서 우선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요즘 수근부대원들은 나카타를 ‘하부’라고 불렀다. ‘하부’란 오키나와에 있는 독사인데, 한번 물리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 독성이 강했다. 이 독사는 전에는 숲에 숨어살았다는데 숲에 방공호를 뚫느라 파헤쳐진 탓인지, 요즘엔 군부막사와 작업장에 까지 나타나 이빨을 드러냈다.

실제로 칠곡에서 온 신현욱은 이 독사에게 다리를 물려 입으로 독을 빨아내고 담뱃진을 발랐지만 의무대로 이송된 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막사와 작업장을 오가며 군부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독기 뿜은 이빨을 드러내는 나카타는 그야말로 ‘하부’였다.

“전체 차렷! 이봐 오가와 하사, 특공대원이 주민들에게 함부로 기밀정보를 털어놓으면 안 된다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오늘 여기서 정보를 털어놓은 사람 없어?”
“없습니다!”

특공정 하사들을 세워놓고 훈계하는 나카타의 음성이 방안까지 생생히 들렸다. 근데, 뜻밖에도 우타가 그 독기를 띤 ‘하부’에게 대차게 반발했다.

“나카타 하사님, 여기에 ‘주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여학생들은 모두 청년대원과 의무대원입니다!”
“어쨌든, 너희 특공대원 5명은 주민들과 과도하게 접촉했다고 상부에 보고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이때 또 다시 우타가 고성으로 대들었다.

“나카타 하사님, 이 특공대원들에 관해 상부에 거짓보고를 하면, 저도 하사님에 대해 전대장님께 보고할 겁니다.”
“이봐, 치넨씨....왜 그러셔? 뭘 보고한다는 거야?”
“스스로 잘 아시잖아요. 여기 지금 증인도 있어요!”

그러자, 한참 동안 바깥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나카타가 우타의 강한 반발에 꼬리를 내린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치넨씨...여기 군화가 하나 더 있는데...한 사람은 어딜 갔지?”
“그건...전대장님이 방공호 시찰 나갈 때 신던 군화예요 ”
“이 다 떨어진 군화가 전대장의 것이라고?...그래?...어디 두고 봅시다. 전대장의 것인지 아닌지는 차차 밝혀질 테니까...그건 그렇고...치넨씨, 앞으로 여학생과 하사관들이 너무 깊이 접촉하지 말게 하세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수는 나카타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우타가 방안으로 들어와 병풍을 재껴주자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하사관 5명은 모두 자기자리에 되돌아와 앉았지만, 여학생들은 다시 방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 여학생들이 왜 그렇게 나카타의 음성만 듣고도 몸서리치게 도망치는지 우타에게 물어봤더니, 우타는 사랑채 뒤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이수씨, 나카타 하사가 지난주 우시와 하츠를 ‘메이와쿠’ 했데요”

이수는 머리가 땅바닥으로 추락할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섬에서 ‘메이와쿠(迷惑)’란 성폭행이나 강간을 뜻하는 은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타에 따르면 나카타는 남달리 귀여운 하츠에게 다가와서 틈만 나면 집적댔는데, 그게 통하지 않자 퇴근을 하고 돌아가는 우시와 하츠를 몰래 뒤따라가 아사마을 고개에서 권총으로 두 사람을 위협하며 ‘미혹행위’를 했다는 거였다.

이수는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머리를 다시 제자리로 가게 간추리자 가슴에서 타던 분노가 목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불태웠다. 서상덕의 말처럼 저 ‘하부’를 살려뒀다간 우리 동지들뿐만 아니라 자마미 주민들까지 모두 죽일 것 같았다.

앞으로 전세가 미군에게 밀려 투항을 해야 할 단계에 오면 틀림없이 주민들을 집단자결로 몰아넣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수의 눈에 핏줄들이 한꺼번에 솟아올라 사방이 붉게 물들여져 보였다.

나카타 때문에 특공정 하사들을 위한 저녁 잔치는 허탈한 분노 속에 끝났고, 여학생들은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가느다란 어깨능선을 들먹이며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적 가운데 가장 사악한 적은 남의 소유를 마음대로 탈취하려는 적이다.

우타는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절망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해 흐릿한 눈으로 앉아있는 이수를 달래기 위해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수씨, 오마스 마쓰이치라는 사람 아세요?”
“엉?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하아, 이수씨는 아직 오키나와 사람이 덜 됐군요. 오키나와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오키나와 출신 최초의 군신(軍神)이니까요.”
“군신?...그렇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네?”
“네, 재작년 1월 태평양에 있는 과달카날섬에서 미군과 격렬하게 싸우다가 그가 인솔한 부대원 전원과 전사했죠. 육군성은 그의 전과를 천황께 보고했다고 발표했어요.”
“천황께 보고했다는 건 엄청난 예우인데?”
“네, 그게 바로 그동안 푸대접하던 오키나와인들을 전쟁터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죠.”
“그렇네...”
“그 뿐이 아니에요. 나하에서 그를 위한 현장(縣葬)이 치러졌는데, 현민 1만 명이 참례하고, 모든 소학교 학생들이 나하 시내를 행진했죠. 또 그를 위한 노래가 제작되고, 극장에선 그에 대한 연극이 상연되었죠.”
“오키나와 젊은이들은 그처럼 자기도 군신이 되겠다고 다짐했겠네...”
“네, 맞아요....아까, 오가와의 말을 들으니까 오마쓰 군신이 생각났어요.”

현재 자마미에 주둔하는 특공정 하사는 모두 80명인데 이들은 해상정진 제1전대에 배속돼 가스미가우라에서 훈련을 받은 뒤, 자마미로 왔다.
앞으로 ‘군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소년병들 가운데는 말투로 봐서 약 10여명이 조선반도에서 강제로 징집되어온 게 분명했는데, 이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란 사실을 결코 밝히지 않았다.

이수가 짐작하건데, 오가와 하사도 어투나 생김새로 볼 때 조선인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군신이 되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우타의 얘기에 따르면 오키나와 최초의 군신 오마쓰는 과달카날에서 전투를 하다 죽은 게 아니라 굶어죽었다고 했다.
이곳 자마미도 식량이 바닥나 곧 과달카날섬처럼 식량부족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주민들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산속에 있는 식물들 가운데 식용 가능한 나물들을 뜯어 끓는 물에 익혀 먹는 중이었고, 조선인 군부들도 생풀 잎을 하도 많이 뜯어먹어 이빨과 입술이 시퍼랬다.

이처럼 식량부족에 모두 곧 굶어죽을 형편인데도 오늘 우타는 군신이 되고 싶어 하는 특공대원들에게 ‘마지막 잔치’를 차려주기 위해 남은 쌀을 아낌없이 털어 내놨지만, 나카타 때문에 잔치는 꺼림칙한 생채기만 남겼다.
이수는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며 우타에게 물었다.

“우타, 아까 그 ‘하부’에게 어떻게 그렇게 세차게 공격할 수 있었지?”
“하아, 이수씨, 하부는 절대 피하면 안돼요”
“그래?”
“하부를 쫓는 방법은 목검으로, 하부가 고개를 쳐들 때 세차게 후려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부는 꼭 다시 나타나 사람을 해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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