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게 화답하다(和子由)

                                                소동파


인생살이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녹는 눈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 같네

그 위에 몇 개의 발자국 남겼다 해도

날아간 뒤 동인지 서인지 어찌 간 곳을 알겠나.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요임금 때에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는데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일이 생겼다. 고요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요임금은 용서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고요는 세 번이나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요임금은 세 번이나 용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천하가 고요의 법 집행이 준엄함을 두려워하고 요임금의 형벌 적용이 관대함을 좋아한다.’

소동파(蘇東坡·1037~1101)가 스물두 살 때 과거시험에 제출한 답안지다. 그는 다음 구절에 이렇게 설명했다.

‘상을 줄 수도 있고 상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고, 벌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안줄 수도 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정의로운 것이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고시관리위원장인 구양수(歐陽修)가 이 답안지를 보고 무릎을 치며 수석으로 뽑았다. 그러다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두 번째로 밀어내렸다. 아무래도 자기 제자인 것 같아 차석으로 제친 것이다. 재주는 단연 앞섰으나 혹여 있을지 모를 구설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소동파의 문재는 뛰어났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정치적 재능 또한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경우엔 정적이 많아진다. 소동파도 그래서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며 여러 지역을 떠돌게 된다. 나중엔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海南島)까지 귀양을 갔다.

하이난섬의 면적은 타이완(臺灣)과 거의 맞먹는다. 제주도의 18.6배로 경상도보다 크다. 지금은 연중 해수욕을 즐길 수 있어 ‘동양의 하와이’로 불린다. 그러나 옛날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해적과 말라리아 탓에 변경 중 변경이었다. 워낙 궁핍한 오지여서 유배지로 유명했다.

소동파가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동파서원(東坡書院)이 남아 있다. 이전까지 과거 응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이곳 젊은이들이 소동파 덕분에 처음으로 급제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파는 불행했지만 하이난은 행복했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가 이곳에서 남긴 이 시 ‘자유에게 화답하다(和子由)’는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고사의 원천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의 핵심은 기러기 앉았던 발자국마저 눈이 녹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데 인생의 자취도 그와 같이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의미다. 이 시를 계기로 ‘설니홍조가 인생의 덧없음이나 희미한 옛 추억을 말하는 비유로 곧잘 쓰인다.
하이난섬에서 7년 동안 유배를 살던 그가 조정으로 복귀하던 중 길에서 삶을 마쳤으니, 당송팔대가 중 으뜸이라는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해 수많은 문장을 남겼다. 요즘 중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한 가지 바라는 건 사람이나 오래 살아, 천 리 밖에서 고운 달을 함께 봤으면’이라는 소절도 그의 작품에서 나왔다.

중국인들이 그를 이토록 좋아하는 것은 천고의 명작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여기에 형식적 제약을 거부하고 실용성과 합리성을 잘 살린 점, 자연미와 개성미를 중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한 점도 함께 작용했다.

그는 하이난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 황무지에서 구사일생 귀양살이 내 원망치 않으리니, 이번 유람의 기이한 절경이 평생에 으뜸이어라(九死南荒吾不恨, 玆遊奇絶冠平生)’(6월20일 밤 바다를 건너며’)고 노래했다.

 
고두현/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거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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