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여학생들이 다 모였다. 시즈, 우시, 하츠, 가메, 히로코 이렇게 다섯 여학생들은 모두 우타의 후배로, 이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일본군들의 구토 같은 명령에 짓눌려 본심을 가누지 못했지만 우타가 되돌아 온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함께 모이게 되자 한 결 같이 티 없고 맑은 표정이 되었다.
이들은 어릴 때 후루자마미에 있는 검은 천매암 동산 앞 새하얀 산호모래밭에서 함께 뛰어 놀던, 비밀조직 ‘오조(王女)’의 멤버들이다.

오조란 공주란 뜻이다. 이들이 모임의 이름을 ‘오조’라고 지은 것은 각자가 자마미 근처에 있는 무인도의 왕녀란 의미로 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섬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여학생들은 후루자마미의 비밀장소에서 만나면 서로 이렇게 불렀다.

“야카비왕국의 시즈왕녀님, 가히왕국의 하츠왕녀님, 아게나시쿠왕국의 히로코왕녀님....”

하지만 전쟁 때문에 이 ‘게라마제국’의 왕녀들은 지금 일본군의 청년단원으로 차출돼 부대에서 취사, 청소, 노역을 하고 있고, 그들을 돌보던 우타 조오(女王)는 지금 의무대에서 일하는 간호사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오늘 우타의 집에 모인 여학생들은 모두 오랜만에 ‘왕녀의 지위’를 되찾았다. 우타가 이 후배들에게 ‘왕녀님’이라고 불러주자 모두 한참 키득키득웃다가 와하하 배꼽을 잡더니, 모두 박자를 맞춰 우타에게 함께 고개를 숙였다.

“네에, 조오 폐하...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학생들은 서로를 왕녀님이라 부르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들떠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들며 신나 했다.

이수는 마루에 걸터앉아 이 왕녀들의 수다에 정신을 완전히 잃고 멍하니 대문 쪽을 바라보는데, 허리에 일본도를 찬 특공정 하사관 5명이 훈련을 끝내고 발을 맞춰 집안으로 절도 있게 걸어들어 왔다.

3월 들어 미군 전함들이 서서히 자마미섬을 욱죄어 밀려오고 함재기의 폭격이 계속 일본군들을 당황시키자 우메자와 전대장은 토미요를 전대본부 소속 간호부로 임명하고, 전대장의 숙소도 본부 벙커로 옮겼다.
대신 우타의 집 안채에는 자마미소학교에서 내무반 생활을 하던 해상정진대 특공정 우등생 5명이 배속되었다. 오가와, 엔도, 마쓰야마, 요시다, 야마타 등 이 이들이다.

이들은 이름만 하사관이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고 조국을 위해 삶을 내던지기엔 너무 어려 보였다. 때문에 건강하고 환해 보여야 할 이 아이들의 빛나는 구리 빛 피부는 오히려 처절해보였다.
이 하사관들은 여학생들이 숙소 앞에 몰려와 있는 걸 발견하자, 입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어색한 태도로 마루 쪽을 곤혹스럽게 쳐다보았다. 이를 본 우타가 하사관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자, 여러분, 모두 저기 우물터에서 손을 씻은 뒤 이 마루에 다시 모여요. 오늘은 우리 영웅들을 위해 자마미의 왕녀들이 만찬을 차렸거든요!”

하사관들이 우물터로 발길을 옮기는데, 이들 중 고참병인 오가와 하사관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더니, 우타에게 한마디 했다.

“누님, 왕녀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면 헌병한테 걸릴 수 있어요...”
“응?, 알아...이건 마마고토(소꿉장난)이거든...이 오키나와 열도에 있는 섬들이 옛날엔 모두 각각 작은 왕국이었어. 그걸 빗대어 우리들끼리 어릴 때 모이면 서로 왕녀라고 불러준 거였어...”
“아, 그랬어요?”

한꺼번에 부엌으로 몰려 들어간 여학생들은 삽시간에 음식을 차려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중 가메와 히로코는 현재 본부에서 취사담당이니까.
우메자와 전대장이 숙소로 쓰던 방의 그 탁자에 여학생들이 쌀밥, 삶은 고구마, 된장국, 야채절임 등을 가지런히 내놓았다.
음식이 들어간 뒤 우타와 이수가 방 안으로 들어 가보니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하사관은 하사관끼리 서로 낯가림을 하느라 말을 걸지 못한 채 서먹하게 앉아 있었다. 이를 본 우타가 한마디 했다.
“왜 이렇게 따로따로 앉아있어? 자, 남자 5명, 여자 5명이니까,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앉아요...”
“아녜요 언니, 남자 6명, 여자 6명이에요!”
“아하 그런가?...우리 2명도 끼워주는 거야?”
“그럼요!”

자리에 앉은 우타는 곧 저 짓 푸른 바다에서 파편으로 흩어져야 할 이 하사관 청년들에게 작심하고 잔치를 열어줄 태세다. 무의미하게 징징 짜는 눈물보다는 광선들끼리 부딪치며 화려하게 불꽃을 터뜨리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우타는 먼저 술을 한잔도 못 마시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근데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하사관들은 마지막 ‘자살공격’을 할 때 비장하게 술 한 잔을 마신 뒤 천왕과 히노마루에 경례하고 출정하기 때문에 이미 한잔을 마실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을 해봤을 것이다.
또 ‘왕녀’들은 어린 시절 비밀모임 때 가끔 술을 한잔씩 홀짝거려 봤기 때문에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우타는 함께 술 두 잔을 마신 뒤, 차례로 돌아가며 각자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12명 모두가 자기의 이름만 밝힐 뿐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하사관들은 주민들에게 함부로 신분을 털어놔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이름밖에 말할 수 없다.
드디어 이수가 자기소개를 할 차례가 오자 우타가 존댓말로 얘기를 꺼냈다.

“이분은 제가 소개할 게요. 이분의 이름은 이시타 리수....수상근무중대 조장이고, 전대본부 연락병이에요...우리 후배들에게 먼저 얘기하려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지금 말씀하는데...실은 저의 남편입니다”
“네에? 언니, 언제 결혼했는데요?”

5명의 여학생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합창으로 물었다.

“지난해 10월 15일, 나하에서 했어. 미군의 폭격 때문에 우리 후배들을 초청하지 못했어...미안해”
“우아!!...언니, 축하해요. 늦었지만 오늘 우리 이 자리를 결혼축하 잔치로 해요!”

여학생들이 열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며 들끓자, 하사관들도 덩달아 “축하합니다”라며 잔을 높이 들었다. 이때 히로코가 이수와 우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숨 가쁘게 말했다.

“저 이분, 누군지 알아요. 전대장님이 말씀하시는 거 옆에서 들었는데...이분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천재래요. 말라리아 걸린 전대장님이 이분이 지어준 약을 먹고 다섯 시간 만에 벌떡 일어났데요...”

그러자 여학생들이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너무 잘생겼어요!”를 연발했다. 결국 이수는 인사말을 하라는 여학생과 하사관의 요구에 떠밀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영웅 여러분, 이 전쟁에서 제일 소중한 건 목숨입니다. 함부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승리합니다.”

이수가 이렇게 얘기하자, 오가와 하사관이 목 아래 단추 하나를 풀며 이수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조장님, 그건 너무 나약한 말씀입니다. 사나이라면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보다는 의연하게 죽어야죠. 미군의 군함이 아무리 커도 우리는 특공정 마루레로 적들을 수장시킬 수 있어요. 이거 일급 기밀이지만 마루레엔 250㎏의 폭약이 장착되어 있거든요. 그 정도면 미군 구축함 1대는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오가와, 그 말이 맞아. 그럼에도 자네가 죽으면 안 돼. 출정했다가 적선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더라도 꼭 되돌아와야 돼. 그래야 그 다음에 더 큰 순양함을 폭파할 기회가 생기니까 ”
“조장님, 되돌아오는 걸 전제로 한다는 건 특공대원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훈련받았고,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 죽는 게 두렵진 않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죽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싸우는 거야. 자기를 스스로 죽이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라.”
“그렇지만, 우리는 비굴하게 살기보단 조국을 위해 떳떳이 이 한 목숨 버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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