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07시, 청량리역 대합실에 열둘이 어김없이 모였다. 소풍간다고 잠을 설쳤나? A의 눈두덩은 여태 부어 있고 B의 얼굴은 부석부석하다.
기침 감기로 쿨럭이는 C도, 꼭두새벽 괴산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D도 지극 정성이다. 이게 뭐라고 ㅎ
떡방앗간 주인장 E는 따끈한 백설기를 머릿수만큼 준비해 왔고 유일한 후배 F는 넉넉하게 넣은 삶은 달걀 봉다리를 손에 들고 소풍길에 합류했다.(갑자기 한 자리가 펑크 나, 후배 F로 급땜질) 모두는 소백산 아래 소읍, 풍기에서 중딩시절을 함께한 소꿉친구들이다.



중딩 70학번으로 만나 진갑년인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가고 있으니 원! 작년엔 환갑 핑계로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엔 해가 바뀌자마자 진갑 운운하며 콧바람을 쐬잔다. 하여 거사를 모의한 바 당일치기 '감성바다여행'으로 결론 짓고서 지난달 22일 개통된 경강선 KTX를 예약하게 된 것이다.

과거엔 청량리에서 제천이나 영주역을 거치지 않고선 시간적으로 당일치기는 꿈도 못 꿨다.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 덕에 새로 깔린 레일로드가 이 모든 걸 뒤집어 놓았다.
07시 20분, 평창 엠블렘이 박힌 강릉행 KTX가 승강장에 거구를 들이밀었다. 강릉역까진 1시간 40분이면 닿는다. 이제 동해안은 서울의 앞마당이 됐다. 만종역을 지날쯤 치악산 능선 위로 붉은 햇살이 부채살처럼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산야를 일으켜 세웠다.

만종역에서 중앙선과 경강선이 갈라져 KTX는 둔내(08:36)로 향한다. 둔내 다음이 평창역이다. 평창역은 아직은 패싱! 08:51분 오대산역에 멈춰섰다. 정차 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이 거의 없다. 아마도 올림픽 전후하여 반짝 붐빌 것이나, 올림픽이 끝난 후가 문제다.
차창을 스치는 을씨년스런 황갈색 겨울 산야가 둔내를 지나면서부터 하얗게 바뀌었다. 강원 산간이라 쌓인 눈이 온전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강릉이 가까워오자 눈은 씻은 듯 자취를 감췄다. 두텁게 껴입은 옷이 부담스러울만치 날씨가 푹했다.



청량리역을 벗어나 1시간 40분만인 09:02분, 강릉역에 내렸다. 고속도로 정체를 인내해야 닿을 수 있는 강릉이었는데... 새로 지어 산뜻한 驛舍의 외관이 무척 매혹적이다. 경포 가시연과 동해 일출을 형상화한 설계란다. 역사는 지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전체적인 칼라는 화이트와 블루로 푸른 바다와 포말이 연상된다.
강릉역 앞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겨울엔 너울성 파도가 잦은데 오늘 강릉의 바다는 잔잔한 편입니다. 여러분의 '동해바다 감성여행'을 반긴다는 의미입니다" 가이드의 뻔한 사탕발림 멘트임에도 모두들 착하게 박수로 화답했다.





우선 바다열차 타고서 감성바다에 빠져들기 위해 정동진으로 이동했다. 버스로 30분, 정동진역 앞에 내린 몇몇은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 삼매경에, 또 몇몇은 막간을 이용해 포장마차를 점거, 오뎅과 곡차를 털어 속을 데우기도 했다.

 


잠수함을 모티브로 만든 4량 테마열차에 올랐다. 가족석도 있고 연인석도 있다. 단체객은 4호칸이다. 좌석은 순방향도 역방향도 아닌 바다방향 2열로 꾸며져 있다. 10시 10분, 바다열차가 해변을 오른쪽에 끼고 北 방향으로 출발했다. 열차 내 DJ가 노래도 신청 받고 게임도 진행한다는 안내 멘트를 날린다. 안인역까지 느릿느릿 北行하던 열차는 다시 정동진으로 회귀해 삼척 방향으로 南行을 이어갔다. 본연의 수송역할을 던지고 놀이열차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오계역을 지나자, 5.5km의 모래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명사십리다. 망상 해변과 대진항, 그리고 묵호 어촌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스쳐 지난다. 일반 무궁화호 열차로 갈아 탈 수 있는 동해역, 촛대바위로 유명한 추암역을 지나 바다열차의 종착역인 삼척역 전 정거장인 삼척해변역에서 내려 다시 대기 중인 버스로 환승했다.



버스는 삼척 시내를 우회하는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로 들어섰다. 2000년도에 개통되어 '새천년해안도로'로 불린다. 잠시 조망이 장관인 조각공원 데크에 섰다. 거뭇한 바위 위로 연신 하얀 포말이 부서진다. 보고만 있어도 일상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버스는 드라이브 코스로 일품이 새천년도로를 벗어나 삼척항에 멈춰섰다.
여행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식도락이다.





삼척항에선 대게가 대세인 모양이다. 먹거리집 간판은 대게 일색이다.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다. "삼척에서 나는 대게는 그 크기가 강아지만 해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라고 조선시대 허균 선생의 '도문대작'에 기록되었을 만큼 유명하기 때문이란다. 상다리가 휠만큼 올려진 대게와 생선회도 열두 입이 뜯고 씹고 마셔대니 게눈 감추듯 금새 동이 났다.
그 맛이 궁금하다면 오는 2월 23일부터 사흘간 삼척항 일대에서 '2018 삼척대게축제'가 열린다 하니 직접 발품 팔아 보시길.





다음 코스는 찬바람 맞으며 레일바이크 타기다. 낮술로 불콰해진 얼굴을 식히기에는 딱 좋으나 개인적으로 놀이기구는 질색팔색이다. 싫다고 따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 오늘은 피해 가기 글렀다.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탑승장인 궁촌정거장으로 이동했다. 2인용 레일바이크에 올라 앉아 부지런히 페달을 돌렸다. 해변을 지나고 산모롱이를 돌아 루미나리에로 단장한 터널도 지난다. 짧지 않은 5.4km 구간이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열두 친구의 표정에서 천지 만물의 이치에 이른다는 耳順을 넘어 환갑, 진갑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소풍 나온 學童일 뿐이다.
불현듯 초딩 6학년 때 이곳 삼척으로 수학여행 왔던 기억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당시 동해안경비사령부와 내 나온 국민학교는 자매결연이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인연때문인지 6학년 때 수학여행은 동경사 함대 승선 견학과 삼척 시멘트공장을 견학한 후 주변 명승지를 둘러보는 코스로 정해졌다. 동경사 측에서 제공한 군용트럭에 설렘 가득 안고 올라 탔다. 군용트럭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려도 마냥 신이 났었다. 영주에서 울진을 지나 삼척까지,,, 지금이라면 상상 불가한 일이다. 어느 부모가 군용트럭 짐칸에 자식을 실어 그 먼 곳까지 떠나 보내겠는가?
쉬엄쉬엄 페달을 돌리는 동안 맞닥뜨린 삼척 풍경에 어언 50년 전 그 시절이 오버랩되니 심쿵할 수밖에. 그러는 사이 레일바이크는 종착점인 장호항 인근 용화정거장으로 들어섰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장호항은 지난 여름 둘러본 곳이다. 북새통이던 여름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한적한 어촌마을 본래의 모습으로 겨울나기 중이었다. 일행들이 장호항을 둘러보며 '감성만끽'하는 동안 몇몇과 함께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연탄불에 구운 호메이고기로 '감성맛땅'에 푹 빠져 들기도 했다.
주마간산 당일치기 '감성바다여행'은 장호항을 벗어나 해거름 녘, 강릉역으로 돌아와 마무리했다.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월간지(3종:월간 봉제기술/배관기술/플랜트기술)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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