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요가 세 사람에게 차례로 술을 따르자 우메자와 전대장이 먼저 잔을 들어 목안에 쏟아 부었다. 세 사람도 뒤따랐다. 이렇게 술을 목안에 다섯 번 정도 말없이 털어 넣은 뒤 전대장은 이치카와 중대장에게 눈을 고정하더니 중일전쟁에서 자신이 얼마나 승전을 거듭했는지 자랑하기 시작했다.

양쪽 주먹을 불끈 쥔 채 역설하는 그의 영웅담이 거의 반시간 넘어 이어지자 토미요는 고개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더니 자세를 유지하지 못해 탁상에 이마를 댄 채 꼬부라졌다.

이번엔 전대장이 자작으로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중대장과 이수도 뒤따랐다. 전대장은 큰기침을 하며 더 심각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
이 틈을 타서 이수는 자리를 잠시 피해주는 척 조용히 일어나서 목례를 한 뒤 문밖으로 나왔다. 실은 오줌이 마려워서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방을 벗어나 뒷간으로 돌아가려했지만 어둠이 이수를 확 둘러싸는 바람에 오줌 눌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돌담에 다급히 오줌을 쌌다.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독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오줌줄기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으며, 물줄기가 언제까지 계속 나올지 몰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별빛이 눈 내리 듯 쏟아지는 오키나와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누군가가 이수의 뒤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당신!, 살아있었군요”

이수의 귓바퀴에 여자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리고, 그녀 가슴의 탄력이 등을 짓눌려왔다.
이수는 바지 앞을 잠그지도 못한 채 돌아서서 그녀를 껴안은 뒤 번쩍 들어 돌담 벽으로 밀쳐 세웠다. 두 사람은 엉킨 채 말없이 혀끝에서 솟아나는 침을 서로 빨아먹으며, 촉감을 느끼면서 더욱 더 서로의 몸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렇다. 촉감은 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입술에도, 뿌리에도, 혓바닥에도, 이파리에도, 배꼽에도, 줄기에도, 엉덩이에도, 꽃에도 있다.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는 촉감을 가졌다. 도마뱀, 노루, 메뚜기, 해파리, 산호도 감촉을 가졌다.

앞으로 과학은 촉감을 향상시키는데 몰입할 테고, 예술은 촉감을 더욱 더 부추길 거다. 모든 유기체가 이 세상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건 다 촉감 덕분이 아닌가? 이들에게 촉감이 없다면 더 이상 번성하고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촉감은 보석보다, 대포보다, 돈보다 더 값지다. 그래서 촉감은 위대하다. 촉감은 궁극이고, 극치다. 두 사람의 촉감이 극치를 넘어서자 우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수씨, 저 정말 말라죽는 줄 알았어요.”
“나도 그랬어...우타”
“이레 전부터 새벽이면 자마미 항구에 수상근무대 군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있을 거라 믿고, 매일 새벽 항구 바로 옆에 있는 돌담 뒤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을 확인하며 기다렸지만...당신만 나타나지 않았어요...근데, 언제 오셨어요?”
“응?, 사흘 전에...”
“사흘 전에 왔는데, 왜 못 봤죠?...나는 오늘 새벽에도 항구에서 기다렸어요. 당신이 오지 않으면 저 바다에 빠져죽으려 했어요.”
“아, 우리가 탔던 배는 자마미항으로 들어오지 않고 시루쪽 해안에 닻을 내렸어. 그리곤 고개를 넘어 후루자마미로 곧장 갔어. 소대장이 이미 자마미 지리를 잘 익혀놨던 것 같아”
“그런 줄도 모르고...저는 빠져죽으려고 했잖아요”

이때 저쪽 안채의 방문이 열리더니 우메자와 전대장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와 화장실을 찾아 반대편 뒤꼍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전대장은 이미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술에 많이 취했지만, 손을 더듬지 않고서도 화장실을 잘 찾아갔다.

“이수씨, 여기가 우리집이예요. 야마시타에 계시는 고모의 동생인 작은 고모랑 둘이서 이집에 사는데 고모는 요즘 아키섬 식량증산에 동원되었어요. 한 달 전부터 저 안채가 우메자와 전대장의 숙소로 수용되었어요. 저는 이쪽 바깥채에 기거하면서 전대본부 의무대에 출근해요”
“응, 그래?......그동안 힘들지 않았어?”
“임무는 괜찮은데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 너무 힘겨웠어요...”
“...근데, 미안하지만 우타, 나는 저기 화장실로 간 전대장이 술자리로 되돌아가기 전에 내가 먼저 되돌아가 자리에 앉아있는 게 나을 듯한데...”
“네, 그렇게 하셔요. 근데 이수씨, 아까 토미요란 그 여자, 이곳 본부 뒤쪽에 있는 위안소의 관리자예요. 조선에서 자랐데요...조선말을 잘하니까...말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아, 그렇구나...”
“이수씨, 조금 이따가 먼저 귀대한다고 보고하고 안방으로 들어오세요. 저는 불을 끄고 있을 게요”
“음, 알았어...”

이수가 술자리로 되돌아오자 이치카와 중대장이 눈을 찡긋하더니 환히 웃었다. 그 표정으로 봐서 이치카와 중대장은 이수와 우타를 다시 만나게 해주려고 우친을 가져오라고 했으며, 이수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나가서는 우타를 잠시 만나고 들어온 걸 짐작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저는 먼저 귀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시타, 조금만 더 기다려. 아직 전대장님께 본론을 얘기하지 못했어.”

과연 이치카와 중대장이 얘기하려는 ‘본론’이라는 게 뭘까? 이수가 그 ‘본론’에 대해 생각할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우메자와 전대장이 고르지 않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전대장은 그새 술이 조금 깼는지 또렷한 눈으로 이치카와 중대장을 쏘아보았는데, 그 눈빛엔 수상근무대의 중대장이 일개 조선인 군부와 무슨 밀담을 나누고 있느냐는 핀잔도 포함되어있어 보였다. 전대장의 눈빛을 바꿔놓기 위해 이치카와 중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대장님, 이 아우가 저희 제 103중대의 중대조장입니다. 전대장님께서 이 아우를 전대장님의 연락병으로 차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해상정진 1전대와 수근부대 간의 전달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으로 봅니다.”
“그래? 조선군부 같은데 일본말은 잘하는가?”
“예, 물론입니다. 저보다 더 잘합니다.”

그제야, 우메자와 전대장은 이수의 얼굴을 처음으로 눈여겨 쳐다보더니 가타부타를 하지 않은 채 이수 쪽으로 술병을 들고 팔을 뻗었다.
이수는 다급히 꿇어앉으며 빈 잔을 들어 전대장이 따라주는 아와모리를 정중하게 받아 단숨에 비운 뒤 잔을 내려놓았다.

“전대장님, 이 놈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입니다. 식물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다니다가 여기로 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장교로 오지 않고 군부로 왔나...그래, 자넨 이름이 뭔가?”
“이시타 리수입니다”
“좋아, 이치카와 중대장의 추천을 받아 오늘부터 자네를 우리 해상정진대 제1전대 연락병으로 임명한다.”

전대장이 이렇게 얘기하자 이치카와 중대장은 이수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며 경례를 붙였다. 이수도 동시에 중대장을 따랐다.
하지만 이수는 중대장이 왜 이렇게 자신을 전대 연락병으로 간절히 추천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잠시 후 이치카와 중대장이 이수를 추천한 건 연락병으로서 매일 한 번씩 이곳에 들릴 수 있게 해주기 위한 거란 생각이 미쳤다. 이를 깨닫고 나자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의 마음 깊은 배려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자. 다들 일어서지. 나는 내방으로 갈 테니까. 각자 부대로 복귀하게”

머리를 탁자에 박고 한잠을 푹 쉰 토미요가 고개를 들며 얼굴에 묻은 침을 닦더니 다시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우메자와 전대장이 자리를 뜨자 이치카와 중대장은 문밖으로 나와 이수에게 귓속말로 얘시했다.

“전대장님과 토미요는 새벽 6시에 여기서 나갈 거야. 마주치면 절대 안 돼.
자네는 5시에 여기서 빠져나와 부대로 복귀해.”
“고맙습니다. 중대장님”

중대장이 대문 밖으로 나가자 이수는 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가 부엌문을 열었다. 요즘 이수는 매일 바닷물에 목욕을 하기 때문에 살갗에 소금기가 바싹거리긴 했지만 몸은 깨끗했기 때문에 부엌에서 얼굴만 씻고 안방으로 들어가려했는데, 부엌바닥을 보니 우타가 넓은 나무물통에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두었다.


이수가 물통에 들어가 물을 끼어 얹고 있는데 우타가 살며시 부엌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말없이 이수의 등에 비누칠을 한 뒤 바가지로 이수의 몸에 물을 여러 차례 퍼부었다.
돌아보니 우타도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수는 수건으로 몸을 닦지도 않고 돌아서서 우타의 맨몸을 껴안았다. 우타의 몸과 머리카락에서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상사수 향기’였다.

이수가 매끄러운 우타의 몸을 꼭 껴안자 우타는 이수에게 매달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양다리로 이수의 허리를 찰싹 감았다. 두 사람의 뭄무게에 물통이 부서질 것 같아 이수는 우타를 껴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요위에 눕혔다.

이 전쟁 속에서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과 빠져나가기 힘든 어둠, 이것을 꼭 받아들여야 한다면 두 사람이 함께 뿌리를 생성시켜 이 고통과 어둠을 밑거름으로 빨아들여 함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리라고 다짐하며 서로 껴안았다.
요는 물기와 땀으로 갈수록 축축해졌고, 방안엔 희뿌옇게 ‘상사수’의 향기가 신선하면서도 눅눅하게 가득 찼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