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장님. 제 아우가 우친을 가져왔습니다. 이 우친을 드시면 오늘 저녁에 아무리 아와모리를 많이 마셔도 내일 아침엔 멀쩡해집니다.”
“그래?, 그렇담 나도 한 뿌리 줘봐”

우메자와 전대장은 이수가 먹기 좋게 살짝 익힌 우친 뿌리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댔다. 맛이 무척 떫고 쓸 텐데도 전대장은 겉으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황군장교로서 풀뿌리 하나에 얼굴을 찡그린다면 품격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하는 건지, 다시 한 뿌리를 더 입에 넣고 씹더니 물 잔을 찾아 단번에 목구멍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수가 보기에 전대장은 일본사람치고는 얼굴선이 굵었으며, 나이가 28세로 알고 있는데 여러 전쟁터를 거치면서 붉게 그을린 피부 때문인지 서른을 훨씬 넘어보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이 전쟁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황색에 갖가지 색상이 깃든 류큐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쟁반에 반찬을 얹어들고 나타나며 명쾌한 음성을 터뜨렸다.

“하아, 우리 자마미에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있었네?”

그녀가 짓궂은 눈길로 이수를 아래위를 훑으며 엷은 웃음을 흘리자, 우메자와 대장이 심통한 표정을 지으며 음성을 깔았다.

“그래?, 자마미에 나보다 더 잘 난 남자가 있단 말이지?”
“아이, 대장님도...질투하시나봐?...당연히 자마미, 아니 오키나와 전체에서 우리 대장님보다 더 잘 생긴 남자는 없죠오!”

우메자와 전대장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도 화려한 기모노 색상 때문인지 이수의 눈길은 그 여인 쪽으로 자꾸 쏠렸다. 그녀는 우메자와 전대장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있으면서도 눈은 계속 이수 쪽을 쳐다보며 뜻 담은 눈짓을 보냈다.
오키나와 의상을 입었지만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오키나와 여자 같진 않았다.

억양부터가 오키나와식이 아니라 본토 오사카 식이었으며, 하얀 피부에 짙은 화장을 한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가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우메자와 대장의 목 멀미에 입술을 살짝 스치며 의식적으로 다시 이수를 쳐다보았는데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우메자와 대장은 어깨를 들먹이며 으스대더니 목마른 들소의 울부짖음 같은 갈라진 저음으로 내뱉었다.

“토미요...오늘은, 우리 죽도록 한번 마셔볼까?”
“예?...네, 좋아요!. 대장님, 오늘 우리 진짜 먹고 죽읍시다.”

전대장의 얘기가 떨어지자 토미요가 바깥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아와모리 2병만 더 갖다 줘!”

하지만 토미요가 큰소리로 주문을 했는데도 바깥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없고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별안간 얼굴을 찡그리며 노기를 띤 채 몸을 일으키더니 빠른 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토미요와 어떤 젊은 여자가 부엌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방안으로 새들어왔다.
조금 뒤 토미요가 발로 마루를 탕탕 울리며 걸어 들어와 술 마실 주발 4개를 챙겨 들어와 털썩 주저앉더니, 주발 하나를 우메자와 전대장에게 놓고, 다음엔 이치카와 중대장, 이수, 그리고 토미요 자신 앞에 차례로 “탁탁”소리 나게 얹어 놓았다.

“자, 대장님, 그리고 중대장님, 또 젊은 부하, 우리 네 사람은 오늘밤 절대 두발로 걸어 나갈 수 없습니다. 까짓것 갈 때까지 가봅시다.”

모두 아와모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데, 검은색 류큐식 기모노를 입은, 발목이 가느다란 여자가 이수의 등 뒤에서 나타나 쟁반에 얹은 아와모리 2병을 식탁에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바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순간, 토미요가 그 여자에게 뭔가 종용하려는 듯 그 여자의 기모노깃을 확 움켜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 여자는 토미요의 손길을 의식적으로 세차게 뿌리치며 자신의 기모노 자락을 확 잡아 당겼다.

이 바람에 발목 가는 여자는 탁자 옆에서 후딱 미끄러지며 어쩔 수 없이 오른 손으로 이수의 어깨를 세차게 짚었다.
어깨를 짚고 나서도 그녀는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해 이수 쪽으로 허리를 숙이며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다. 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균형 잃고 쓰러져 내려오는 그녀의 양팔을 순간적으로 콱 잡았다.

“어머나, 죄송합니다!”

기이한 일은 언제나 상상할 수도 없는 순간에 발생한다. 이수는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계속 그녀의 발목만 내려다 봤을 뿐 얼굴을 미처 쳐다보지 못했는데, 그녀의 팔을 잡은 뒤 고개를 더 높이 치켜 들어보니 어깨를 짚은 여자는 ‘우타’였다.
이수의 어깨에서 손을 급하게 떼던 우타도 팔을 잡아준 남자가 이수라는 걸 깨닫자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그 응어리진 눈빛으로 이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영겁 같은 찰나였다.

“흥, 그렇게 술 한 잔 따르고 가라고 해도 도도하게 굴더니만,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그새 꼬리를 치네...”

토미요의 타고난 관능적 감각이 우타의 눈빛을 놓칠 리 없었다. 토미요는 오늘 우타의 도도함에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지금의 행동을 보자 속이 더 울렁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우타는 토미요에게는 대꾸는커녕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급히 방문 쪽으로 가서 돌아서더니 방안 사람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바깥으로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삶은 만남에 의해 결정된다. 만남은 삶을 좌우한다. 삶이란 만남의 결과다. 찰나의 눈빛이었지만, 우타의 눈빛 속에 들어있던 숨 막힘과 애절함이 순식간에 이수의 망막을 파고들어 몸속으로 전달되더니 이수의 간장을 녹이기 시작했다.

< 삶은 만남의 결과다>
미치도록 반가우면서도 겉으로 표출할 수 없는 절박감이 이수의 허파와 간장을 용해시키는 바람에 몸속이 텅 비어졌다. 이수는 그 텅 빈 속을 우타의 눈빛으로 채우려고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래, 우타의 눈빛만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

우타의 치맛자락이 일으켜놓은 기묘한 서먹함이 한참이나 방안에 그대로 남아있자, 우메자와 전대장은 이 서먹함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단호하게 못 박았다.

“토미요......치넨씨는 우리 자마미에서 가장 유능한 간호사야...임무에 충실할 수 있게 해줘야지!”

전대장이 선을 긋자 토미요는 더 이상 맞서거나 대꾸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난 얼굴을 금방 풀며 장밋빛 입술을 활짝 열었다.

“대장님, 부하가 가져온 우친을 저도 한 뿌리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한 뿌리 해야지. 그래야 공정하게 술을 마실 수 있지...”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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