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바닷물에 절인 복장으로 해안에 걸어 나오자 다카세 소대장은 이치카와 중대장이 급히 찾는다며 미간을 좁히며 언짢은 표정으로 이수를 노려봤다. 이치카와 중대장의 막사에 들어가자 중대장은 이수를 강한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큰 음성으로 수근부대원들의 작업방법에 대해 지시했다.

“이시타, 자네는 오늘부터 이틀간 조선인 군부들에게 각자 맡은 일이 무엇이며, 작업을 하는 방법, 작업시간, 공습시 대피방법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확실하게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다카세 소대장과 요시나가 분대장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줄 것을 명령했다. 두 사람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이치카와 중대장은 다시 입에 힘을 주었다.

“이시타, 여긴 해수욕장도 아니고, 식물채집 장소도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전략을 짜느냐에 따라 300명에 이르는 수근부대원들의 목숨이 달렸어. 지금 무수히 많은 함재기를 실은 미국의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수십만 명의 미국 전투병들이 오키나와를 향해 전진해오고 있어. 그러니까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해”
“죄송합니다!”
“자네가 보기에 이곳이 낙원처럼 보이지만, 얼마 뒤엔 이 모든 산천이 쑥대밭이 될 거야. 지금 자네 눈앞에 보이는 어떤 집도, 어떤 나무도, 어떤 풀잎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거야. 때문에 우리는 미군의 함재기공격과 함포사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 그게 땅굴을 뚫어 피하는 방법이야”

< 자마미섬, 한때 지옥같은 전쟁터였지만 다시 낙원이 되었다>

이치가와 중대장은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손짓을 했다.

“이시타, 이리 나와봐. 저기 오른쪽에 보이는 검은 암석의 이름이 뭐지?”
“예?, 네...천매암(千枚岩)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대가 모두 천매암으로 형성되어있지 않을까?”
“네, 조사해봐야 하겠지만...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저 천매암을 곡괭이만으로 뚫을 수 있을까?”
“예, 천매암이란 ‘종이 천매가 쌓아놓았다’는 뜻인데,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 변성되었기 때문에 결만 잘 찾으면 힘들겠지만 파 들어갈 수는 있을 겁니다. 일단 결을 찾아 부수어서 호를 확보해야 할 걸로 보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가 수근부대원들에게 곡괭이로 바위의 결을 부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렛대와 망치가 있으면 작업속도를 더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그리고 천매암층은 천정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나무로 받쳐줘야 할 겁니다.”
“이 섬에 천정을 받쳐줄만한 나무가 있을까?”
“내일 산속으로 올라가 쓸 만한 나무가 있는지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래, 은닉호를 유지할 목재가 얼마나 많은지 조사해서 보고해줘. 이따 얘기하겠지만 이곳에서 우리 103중대가 해야 할 임무는 해상정진대의 특공정을 숨길 수 있는 호를 파는 거야”
“예?...특공정이 뭡니까?”
“그건..미군의 구축함이나 수송선에 빠른 속도로 달려가 충돌해 박살내는 공격보트를 말하지...극비인데...호칭은 ‘마루레(㋹)’라고 한다. ‘바다의 가미카제(神風)’라고도 하지.”

“그렇다면 그 ‘마루레’를 은닉할 호를 파는 게 우리의 임무입니까?”
“맞아, 얼마 전 이곳에서 오키나와 본섬으로 철수한 기지대대가 특공정을 숨길 수 있는 땅굴의 입구는 정해놨어. 그 입구에서 특공정을 감출 수 있을 만큼 깊게 호를 뚫는 게 우리 수근부대가 할 일이야.”
“뚫어야 할 은닉호가 몇 개 정도입니까?”
“우리가 은닉해야 할 특공정이 100척이니까 은닉호는 적어도 40개 정도가 될 거야. 자네가 조선인 군부들을 잘 설득해 단기간 안에 호를 완성해야해”

이수의 103중대가 자리를 잡은 곳은 후루자마미 해안으로 뭍에서 바다를 쳐다봤을 때 왼쪽인 북쪽 끝의 마키노사치와 남쪽의 시루사치 사이에 활처럼 안쪽으로 휘어진 모래사장이다.

< 아름다운 후루자마미 해안...천매암 봉우리 오른쪽 산기슭에 옛 은닉호가 숲에 덮여있다>

다음날 이수가 찬찬히 조사해보니 이 후루자마미 해안은 모래사장에서 올라오면 얕은 평지가 100m쯤 이어지고 그 다음에 곧장 다카쓰키 산이 솟아올랐다.
제 103중대 조선인 군부 300명은 약 1.7㎞ 정도 이어지는 이 해안선 안쪽 산 밑에 무려 40여개의 특공정 은닉호를 뚫어야 하는 거였다.
장비가 오직 곡괭이 뿐인데 어떻게 단시간 안에 천매암 바위에 이 많은 동굴을 뚫을 수 있을까? 나하에서처럼 조선군부에 대한 일본군 하사관들의 재촉과 채찍질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았다.

고민과 걱정에 빠져있는 이수를 중대장이 다시 중대본부로 불렀는데 막사로 들어가보니 이미 하사관 이상 전 부대원이 모여 있었다. 조선인 군부들에겐 특공정에 대한 내용이 극비였지만, 서이수 조장만 이 회의에 참석토록 한 거였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다카세 소대장에게 자료를 주며 특공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곧 여기, 후루자마미로 이송되어 올 이 공격정은 총 100정인데 이 마루레 특공정은 그 존재가 극비 중 극비이다. 마루레가 이 섬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적군에 알려지면 이 특공정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이 특공정은 밤중에 적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암암리에 급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특공정의 크기는 길이 5.6m, 넓이 1.8m, 60마력 정도의 성능을 가진 자동차용 엔진을 탑재한 모터보트다.
특공정 뒤에는 250kg의 폭뢰 2개가 장착되어있다. 최고 속력은 23~25노트, 항속 시간은 3시간 반. 이 특공정은 표면이 약하다. 그러니까 이 특공정을 호로 이동시키거나 다시 바다로 옮길 때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 특공정의 폭뢰는 구축함을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어서 실수로 터지면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이수는 다카세 소위의 설명을 들었을 땐 이 특공정 ‘마루레’의 선체가 금속판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견본으로 도착한 마루레를 보니 외곽이 베니어판이었다. 베니어판으로 특공정을 만들었다는 건 일본의 물자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해군이 개발한 ‘신요(震洋)’ 특공정과 별 차이가 없는데, 신요는 특공정 안에 폭약을 탑재해 특공정과 특공대원이 함께 산화하는 방식이고, 마루레는 선미에 폭뢰를 설치해 공격대상 함정에 폭탄을 투하한 뒤 20초 정도 뒤에 폭발하도록 되어있었다. 다시 말해 훈련을 잘 받은 특공대원이라면 폭탄을 투하한 뒤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공격정이었다.

“그토록 지독하게 훈련을 받은 16~18세 어린 하사관들이 미군함정에 급습해 전함을 폭파해야 하는 특공정이 이렇게 초라할 수가...”

특공정 정비반원들이 교대를 하는 시간에 선체의 나무 바닥을 열어보니 이른바 ‘딸딸이’ 엔진 1대가 내장된 게 전부로 그냥 베니어판 조각배에 지나지 않아 급속으로 운전하다간 파도에 파손될 것 같았다.

가미카제는 공중에서 공격하기 때문에 속도가 빨라 기습효과를 어느 정도 거둘 수 있었지만, 이 마루레는 아무리 살펴봐도 기습효과를 거두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배 표면은 청색으로 색칠을 했는데, 이를 보자 압량면에서 온 유세진이 한마디 했다.

“이거, 꼭 개구리같이 생겼네.”

유세진의 말에 동지들 모두가 킥킥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이수도 거들었다.

“그래, 좋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특공정의 이름을 ‘개구리’라고 부르자. 왜냐하면 이 배를 특공정이라고 부르면 일본군으로부터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배를 ‘연락선’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동지들끼린 그냥 ‘개구리’라고 하자. 그러니까 앞으로 ‘개구리의 배가 터졌다’고 하면 특공정의 바닥에 물이 새는 걸 말하고, 뒷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면 폭탄 2개를 싣는 고정판이 부러졌다는 걸로 이해하면 된다.”

유세진이 이수에게 물었다.

“근데, 형님, 이걸 해변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개구리’를 옮기려면 6명이 1개조가 되어 배 양쪽에 3명씩 선 뒤 배 밑에 3개의 밧줄을 놓아 단번에 들어 옮겨야 한다. 밧줄을 들 때 구령에 맞춰 한 번에 들지 않으면 베니어판이 부서진다. 베니어판이 부서지면 몽둥이찜질을 당할 것이니까 6명씩 조를 나누어 조장을 선정해서 조장의 구령에 맞춰 배를 들고 구령에 맞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이 개구리를 숨길 땅굴은 언제부터 팝니까?”
“내일부터 시작한다. 미군 정찰기에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주로 야간에 작업을 해야 한다”
이때부터 자마미섬에 사는 군인과 군부와 방위대원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땅굴을 파는데 몰두했다.
마루레 특공부대인 해상정진 1전대 산하엔 3개중대가 있는데 이들은 특공정 은닉호와는 별도로 다카스키산 기슭에 50명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호를 3개 파느라 여념이 없었고, 야마토마(大和馬)엔 특공정 정비중대호를 뚫었으며, 우후가라, 우칸진, 아마치지 등에도 군인과 마을 주민들이 수십 개의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어서 자마미섬은 개미떼가 급히 거처를 옮겨 굴을 팔 때처럼 모두가 분주했다.

아무리 허기진 채 열심히 땀을 흘려도 미군 정찰기가 자주 나타나는 걸로 봐서 이들이 상륙하기 전에 마루레를 넣을 은닉호를 다 완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오키나와 본도에 있는 32군 사령부에 정보교육을 받으러 갔던 나카타 반장이 며칠 전 ‘정보하사’로 부임해오면서부터 작업장은 다시 지옥을 변했다.
나카타 정보하사는 정찰기가 날아오는데도 몸을 빨리 숨기지 못하는 조선인 군부들에 대해 단체기합을 계속 주는 바람에, 동지들은 굶은 채 손과 팔에 피 흘리며 파낸 돌과 자갈을 항공사진에 찍히지 않게 옮기느라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보며 입에 거품을 품고 진땀나게 달려야 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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