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입력 2013-02-26 00:09 수정 2014-05-13 23:05

8세기 헤이안 시대의 일본. 나무꾼과 승려, 농부가 폭우를 피해 폐허가 된 성문 라쇼몽 밑에 모입니다. 이들은 얼마 전 관가에서 있었던 재판 이야기를 화제에 올립니다. 어떤 무사 부부가 숲속에서 산적을 만났는데 부인은 강간당하고 남편은 살해된 사건 때문에 열린 재판이었지요. 당사자 네 사람이 불려와 신문을 받는데요. 산적과 무사 부부, 목격자인 나무꾼이 당시 상황을 차례로 증언합니다.


산적 : 숲속에서 낮잠을 자던 나는 지나가는 부부를 보고는 속임수를 써서 남편을 묶었다. 그리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범했다. 일이 끝난 후 여자에게 남편을 버리고 같이 도망가자고 졸랐다. 그러자 여자는 두 남자가 대결해 이긴 사람을 따르겠다고 했다. 결국 나와 남편은 칼싸움을 벌이고 남편이 죽었다. 나는 사람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용감하고 사내다우며 낭만적인 사람에 가깝다.


부인 : 나를 겁탈한 산적은 우리 부부를 남겨둔 채 도망갔다. 나는 울면서 남편의 묶인 끈을 풀었다. 그러나 남편의 시선은 전과 같지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시선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끈을 자르던 단도를 든 채 남편 앞에서 기절해 쓰러졌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의 가슴에 단도가 꽂혀 있었다. 나는 가련하고 무력한 여인이다.


(무당을 통해 불려나온) 남편 혼 : 겁탈당한 아내는 산적에게 나를 죽이라고 애걸했다. 아내의 이 말에 나는 물론 산적마저 분개했다. 무서워진 아내가 도망가자 산적은 내 끈을 풀어주고 그녀를 쫓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수치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부인에게 버림 받은 배신감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한 것이다. 나는 무사 정신이 투철한 사무라이일 뿐이다.




나무꾼 : 나는 이 살인을 처음부터 목격했다. 산적이 여자에게 같이 살자고 조르자 여자는 강한 남자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남자는 여자를 두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남편은 부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면서 그녀를 잃는 것이 말 한 필 잃는 것보다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이 말에 여자는 발악을 하면서 당신들 두 남자는 모두 비겁자들이다, 상대방 한 사람을 해치우지도 못하면서 여자에게 명령이나 내리는 겁쟁이들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을 듣고 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겁먹은 얼굴로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남편이 죽었다. 이들 두 남자는 모두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이다. 

이상은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1950)’ 이야기입니다.똑같은 사건을 놓고 네 사람의 말이 각기 다르지요.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를 찍기 전, 세 명의 조감독이 구로사와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 스토리가 어려우니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지요. 그때 감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과장하지 않고는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 실제의 자기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이다. 인간은 가끔 이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 죽어가는 사람도 이 거짓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랬더니 두 사람은 금세 이해하고 밖으로 나갔으나 한 사람이 끝까지 알아듣지 못해 그를 해고했다고 합니다.





‘라쇼몽’은 투자자를 못 구해 애를 먹은 영화입니다. 겨우 찾은 제작자도 비용을 대폭 줄이겠다는 구로사와의 약속을 받고서야 촬영을 허락했지만 성문 세트만 짓는 데 어지간한 영화 한 편 제작비가 소요돼 반발이 드셌다지요. 작품이 완성된 후 내부 시사회 때는  ‘이건 영화도 아니다’라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등 국제 영화제에서 거푸 상을 받자 그 제작자가 TV 방송에 출연해 감독이나 카메라 맨의 이름은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모든 공을 자신한테만 돌리더라는 겁니다. 이를 본 구로사와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한다’는 ‘라쇼몽 이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회고록 ‘자서전과 같은 것’에 쓰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증인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는 데 사안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네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본 현실을 얘기했으니까요. 최소한 진술의 개연성은 있는 셈입니다. ‘라쇼몽’에 대한 저서까지 낸 도널드 리치라는 사람은 이를 ‘상대적 진실’이라고 표현했지요. 다만 증인들은 불리한 것은 감추고 스스로를 미화시켜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라쇼몽’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살면서 이런 위증의 유혹을 한 번쯤은 느껴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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