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미 항구는 짙은 어둠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마을 전체가 한적함으로 내려앉아 있고 마을 뒤쪽으로 해발 100m 정도 되어 보이는 두어 개의 산 능선들이 검푸른 명암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배에서 내린 군부들은 그저 맥없이 서있을 뿐, 어느 누구도 서로 말을 걸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이 어딘지 몰랐고, 앞으로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자마미항에서 이치가와 중대장을 기다리던 제 103중대 제3소대 다카세 소대장은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먼저 인원을 점검했다. 모두 26명이었다. 이들은 제3소대 3반 소속이었다.

앞서가는 다카세 소대장을 따라 마을의 동쪽 길을 지나 아열대림이 우거진 흙길 고개를 넘어갔다. 간밤 배안에서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막막한 불안감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군부들은 여태껏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수는 자마미 마을 동쪽 고개를 올라오다 고개를 돌려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부둣가 마을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일찍 일어난 어부들의 기침소리와 뒤섞여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평화스러웠다.

이수는 우타가 이 마을 어디에선가 이수를 기다리다 지쳐 선잠에 빠져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잠든 우타가 꿈속에서라도 이수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라는 의도에서 일부러 군화소리를 툭툭 크게 내며 고개를 걸어 올라갔다. 이수가 느닷없이 왜 이렇게 발을 쾅쾅 울리며 걷는지 관심을 가지는 동지들은 아무도 없었다.


고개에 올라서자 내려다보이는 동쪽 바다엔 이미 먼동이 군부들의 얼굴에 비추기 시작했다. 이때 행렬의 가장 뒤쪽에서 터벅터벅 저항적인 몸짓으로 따라오던 서상덕이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위압적인 왼쪽 산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큰 숨을 토해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아, 우리가 참말로 아리랑고개를 넘어버렸네...”

서상덕의 생경하고 뜬금없는 이 한마디는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나, 어떤 의지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고개를 넘어온 군부들에게, 지금 자신이 서있는 상황이 얼마나 황망한 현실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도 서상덕의 자포적인 ‘내뱉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이후 이 고개 너머 해안에서 땅굴을 파야했던, 이 섬에 끌려온 300명의 조선인 군부동지들은 어느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나중엔 일본인 장교들조차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했고, 이 자마미섬 전체를 관할하는 해상정진 제1전대(球 16777) 전대장인 우메자와도 작전명령을 내리면서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지칭했다.

고개를 넘어서자 이수는 눈앞에 이 전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기막힌 영상을 펼치는 걸 넋을 잃고 내려다보았다.
고개 아래쪽엔 하얀 소금밭처럼 밝은 모래사장이 길게 타원형으로 이어지고, 그 앞의 검푸른 바다에선 얇은 파도가 자갈처럼 쪼개졌다.
조각 조각나는 해면 너머엔 서너 개의 섬들이 예술적인 곡선을 그렸다. 아리랑 고개를 다 내려 갈 쯤 곡선 사이에서 주황색 아침 해가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내밀더니 물결 위에 길게 세로로 긴 줄기를 형성했다.

“아, 여긴, 전쟁터가 아니라, 낙원이네...”

이수를 포함한 제 3소대원들은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후루자마미(古座間味)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인원 점검을 하고 해안의 제방에 설치된 간이막사에 짐을 풀었다.
막사에 군장을 내려놓은 이수는 다카세 소대장이 집합명령을 내리기 전에 물불 가리지 않고 막사를 뛰쳐나와 후루자마미의 파도를 향해 달려갔다.
이곳이 우타가 항상 뛰어놀았을 해변이라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친숙함이 발밑에서 몰려왔다.
근데 이곳 해변의 모래는 상상 이상으로 발이 쑤욱 쑤욱 소리를 내며 너무 깊숙이 빠져드는 바람에 달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수는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죽을 것처럼 달려가 온몸을 파도 속에 내던졌다.

“아, 이렇게 파도에 안겨본 게 언제였던가...?”
이수는 군복을 입은 채 아침바다에 그대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군복이 바다 소금물에 절여지면 불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군복은 이미 땀에 절이고 또 절여져 염도가 이곳 바닷물보다 더 높을 것으로 판단했다.

겨울바다인데도 막상 물속으로 들어가자 아열대인 자마미의 바닷물은 그렇게 차갑지 않고 안온했으며, 물 깊이는 어른의 키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머리를 바다 속으로 집어넣자 그 물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부시도록 짙은 청색의 물고기 여러 마리가 이수의 사타구니를 휘감으며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 아래 바닥은 완전히 새하얀 산호골격으로 뒤덮여있었으며 후루자마미 바다 바닥엔 모래가 아닌 하얀 산호골격들로만 이뤄진 곳도 있었다.
숨을 쉬기 위해 물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해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카세 소대장이 화난 표정으로 이수를 향해 빨리 나오라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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