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에 홀리고 귀뚜리에 솔깃했지요

입력 2012-11-29 00:57 수정 2012-11-29 11:06

지난 여름, 가을은 눈과 귀 모두 즐거웠습니다. 매일 아침 수십 장씩 피어나는 나팔꽃 덕분에 눈이 호사스러웠으며 저녁이면 베란다 아래 귀뚜라미 울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취가 있었지요. 날씨는 추워지는데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 채 떠나보낸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내년의 재회를 기다려볼 수밖에요. 부족한 시편으로 그들에게 진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마지막 꽃잎에게 

하룻밤 자고나면 기지개 몇 뼘씩
허공으로 유쾌하게 내질렀지
나팔꽃 줄기
참 질긴 습관

돌고 도는 게 어디 인생뿐인가
덩굴도 밤이면 수런수런, 생애를 휘감아 돈다
꼬인 마음의 실 꾸러미에서 실마리를 찾아
실을 풀어낸 적이 언제였는지

빈 옥수숫대 넘어지는 것처럼 기운 담벼락 뒤편
우주의 숨밭을 들었다놨다 하는
어느 외로운 사람의 카랑한 기침 소리 들릴 때마다
다발로 깨어나던 나팔꽃잎들 

그때 곡마단 나팔 일제히 새벽을 울리고 
장대 위에 물구나무 선 단발머리 소녀들
얼굴 붉으락푸르락
눈에 밟혔는데

아침에 피어나고 저녁에 시드는 이가 어디 너뿐인가
날마다 유언장 고쳐 쓰는 하루살이 병 도진 몸
마지막 꽃잎 한 장 떨어지며 그리는 마무리 획에
묻어가는 건 어떨까 싶어






▲ Erik Satie - Gymnopedie No.1


귀뚜리를 수소문함

태풍 볼라벤이 풀어헤친 머리카락
훅 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자
비 새는 내 방으로 어린 귀뚜리 한 마리 피난 왔다
혹, 세찬 비바람을 피하는 길을 새로 내려다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베란다 아래 뜰에서 목청 돋우던 무리 중
녀석의 가족이 있겠다싶어
여러 번 간곡히 귀가를 권유했으나
타고난 순발력을 온 몸에 실어 거부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
내 근심 한 근을 빼앗아 도주하였다
바깥은 여전히 강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자동차가 뒤집힌다는데
한 생의 태풍은 언제고 다시 오고
손톱만한 녀석의 배짱과 담력으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터, 하여 나는
화분이 옹기종기 놓인 베란다 몇 평을
녀석에게 무상 분양할 의향이 있음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는
새 근심 천 근을 떠안게 되었다

- 졸시 (계간 '시에' 겨울호, 2012)






▲ Erik Satie - Gnossiennes No.1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259명 36%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455명 64%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