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먼저 벗는다”

입력 2012-11-11 05:08 수정 2012-11-28 16:42



“정신이 먼저 벗는다.”

아름다움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은 모든 것을 즉각 드러내지 않으며 최소한의 감춤과 베일이 있습니다. 누드 사진이 소위 ‘예술’이 되려면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벗고 벗기는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드를 보고 정신적 반응이 먼저 오면 예술이고 육체적 반응이 먼저 오면 외설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다보면 결국 미학의 핵심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미현 작가의 ‘케리 시리즈’가 좋은 예가 될 듯 싶네요. “이 사진을 보면 모델의 멈춘 호흡과 감정이 느껴진다. 작가와 모델 사이에 감정적 교류가 충만하고 화면 밖으로 드러날 만큼 촉촉이 배어있다. 모델의 선은 부드럽고 온화하다. 또 렘브란트 조명은 모델의 희고 고운 어깨선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빛나게 한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비례, 균형, 볼륨, 콘트라스트, 토낼리티…. 비록 스튜디오에서 세팅된 사진이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누드 사진이다.”(진동선 사진 작가)


▲ 이미현 ‘케리 시리즈’, 1999

국내에 등장한 첫 나체 사진은 1920년대 일본인들이 자국 여인을 찍은 것이라 합니다. 채색을 한 뒤 춘화 개념으로 통신 판매했다고 하지요. 현존하는 최초의 누드는 1930년대 강대석이라는 신문 기자가 기생의 뒷모습을 찍은 전신 사진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모델을 구하는 일부터 촬영 작업까지의 과정도 무척 힘들었을 테고요. 이렇게 태동기를 거친 누드 사진이 일부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였습니다. 1956년 5월 월간 ‘사진문화’ 창간호에는 다수의 사진들이 공개됐는데요. 모두 얼굴 없는 누드였다고 합니다. 누드란 용어도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지요. 




▲ 강대석 누드, 1930년대

세월이 흘러 현대에 접어들자 누드를 찍는 작가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인체를 보여주겠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철학적 컨셉트를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농후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인종 문제 등 광범위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여자가 옷을 벗었다고 해서 그 전부를 누드 사진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는 주장까지 제기됐습니다. 감상하는 사람은 신체를 통해 철학과 역사, 사회 문화의 코드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지요.

‘고요 속의 고요 같은, 물속의 물 같은, 어둠 속의 어둠 같은, 사랑 속의 사랑 같은’ 작품을 선보인 민병헌의 누드관도 매우 독보적입니다. 작가는 아날로그 흑백 프린트를 고수해 ‘회색의 달인’으로 불리는데요. 평생 동안 찍었던 잡초와 산등성이, 바다와 폭포 같은 자연 경관이 모두 인간의 몸을 닮았음을 깨달은 이후 펴낸 누드집에서 “생, 결국 몸의 몸을 찾는 눈먼 헤맴의 나날이 아니겠는가. 누드라는 이름을 빌려 여기 그 생의 다양한 흔적들을 내려놓는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민병헌의 사진에서) 젠더는 교차하고 섹슈얼리티는 증발하며 에로티시즘은 차가워지고 관음증은 무기력해진다. 시선의 권리는 박탈되고 응시는 불안해진다. 그러나 이름도 얼굴도 갖지 못한 내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득 한없이 희미해짐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만난다면…”(이광호 문학평론가)

“민병헌의 누드에는 몸이 없고 포즈가 없다. 희미하며 아스라하며 잠기고 있으며 겨우 떠오르고 있다. 그의 앵글은 몸을 놓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퍼드덕 몸이 날아오른다. 흔적이 없다. 억압했던 흔적이 없으니 놓여난 흔적도 없다. 그래서 슬프다.”(이원 시인)


▲ 민병헌 ‘MG247’, 2010 

남녀 신체를 개성 넘치는 조형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던 작가로 미국의 허브 리츠(Herb Ritts, 1952~2002)가 있습니다. 80년대 이후 최고의 인기를 얻었지요. 선명한 흑백 대비와 고풍스런 구도로써 피사체를 단순 명료하게 정제한 그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 이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디 크로포드, 마돈나, 리즈 테일러 등 수많은 연예인들을 고객 명단에 올렸으며 만델라, 달라이라마 등 유명 인사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지요.


▲ 허브 리츠, ‘Stephanie with Barbecue’, 1991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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