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우린 시방 지옥으로 끌려가는 중인데, 형님만 혼자서 이죽이죽 웃고 있네예. 뭐 그리 좋은 일이 있습니까?”
“좋은 일은 무슨...”
“근데 형님, 우리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 겁니까?”
“응?...확실하진 않지만 자마미라는 작은 섬으로 가는 중이야.”
“자마미라고예? ...거기 가서는 또 뭐합니까?”
“당연히 땅굴 파는 일에 동원되겠지. 미군들이 지금 태평양을 완전히 점령하고, 오키나와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는 중이니까, 일본군은 오키나와 어디에든 땅굴과 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어.”
“형님, 진짜, 미군이 그렇게 셉니까?”
“아우야, 저번 10월10일에 안 봤어?...그건 맛보기에 불과한 걸 거다.”
“그렇다고 일본 놈들이 쉽게 항복하겠습니까?”
“물론 쉽게 항복하진 않겠지. 허지만 일본이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사람은 이 세상에서 멸종되고 말거다...”
“그러면, 우리는 우째야 됩니까?”
“상덕아, 우리는 일본군이 아니다...일본이 이기든, 미군이 이기든 우린 상관할 일이 아니야. 어쨌든 우리 동지들이 이 전쟁에 휩쓸려 죽지 않고 다시 고향땅을 밟도록 해야 한다.”
“아이고, 형님, 저 귀축미영이 우리를 살려주겠습니까?”
“물론 쉽진 않겠지. 그렇지만...때가 되면 우린 틀림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알겠심더. 저는 형님 말씀만 믿겠심다”

배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워낙 시끄러워 아무도 두 사람의 얘기를 눈치 채진 못했다. 이때 서상덕이 이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아와모리 술 한 병을 꺼냈다. 그는 능숙하게 병마개를 따더니 이수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목이 무척 마른 터라 이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아와모리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주룩 털어 넣었다. 술병을 상덕에게 건네주자 상덕도 아와모리를 단번에 나팔 불더니, 빈병을 바다 속으로 휙 던져버렸다.

“형님, 저 궁금한 거 하나 있심더...저번에 부대로 찾아왔던 그 키 큰 일본 간호사 있잖아예. 그 여자, 형님 애인입니까?”
“어?...그때 봤어?”
“아이고, 형님, 우리 동지들이 하던 일 다 멈추고, 모조리 입을 딱 벌리고 형님과 그 여자만 번갈아 쳐다봤다 아입니꺼”
“그래에?...그 여자는...내 아내다”
“예에?...형님 시방 무슨 소리 하십니까. 언제 결혼했는데예?”
“한 달 전에 했다”
“형님도 참말로 엉뚱하시네. 그러면 우리는 왜 결혼식에 안 불렀습니까.”
“형편이 안 되서 아무도 못 부르고 그냥 둘이서 결혼해버렸다.”


서상덕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는 다른 주머니에서 아와모리를 한 병을 더 꺼내 이수에게 권한 뒤 남은 술을 목안으로 완전히 부어넣더니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허하게 쳐다보았다.

“형님은 진짜, 여복이 많으시네...”
“그게 무슨 소리고?”
“형님, 2년 전 경산역 앞에 형님 찾아와 울고불고 하던 그 오모짱 같이 생긴 일본여자는 우쨌어예?”
“니가 그걸 어떻게 아노?”
“허허, 경산군에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그때 경산역 앞에서 까만 치마에 하얀 우아기 입은 그 일본여자가 모자도 내던져버리고 머리 헝클어트린 채 울며불며 경산역전 마당에 풀썩 주저 앉아있는 거 경산사람이라면 못본 사람 없임더”
“그 여자는 내 여자가 아니다”

“하이고 형님, 형님은 정말 여자를 모르시네. 내 여자고, 남의 여자고 간에 그렇게 젊고 예쁜 여자에게 그처럼 과하게 대하면 천벌 받심데이... 앞으론 그런 짓 하지 마이소”
“아우야, 다시 말하지만 그 여자는 내 여자가 아니다”
“알겠심더. 더 이상 말 안하께예. 근데 그 여자가 형님한테 매달려 울고불고할 때 경산역 수송 창고 뒤에 그 여자 아버지가 숨어서 눈물 닦으며 살피는 것도 알았어예?”
“알 턱도 없고...아우야, 이제 그 얘기 그만하자”
“우쨌거나...형님은 여복이 많은 기라. 우째 일본여자들은 형님만 보면 죽고 못살겠다고 달라붙습니까. 솔직히 그 방법 좀 가르쳐주이소”
“야, 이놈아, 너는 역 앞에서 맨 날 기다리던 그 많은 기생들은 다 우쨌노?”
“머라꼬예?, 그러면 형님이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저를 알고 있었습니까?”
“이놈아, 경산에서 너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노”
“죄송합니더. 형님은 너무 고고하셔서, 저 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심더”
“자...아우야, 우리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이제부터 우리 동지들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그 방법을 찬찬히 생각해보자.”
“예, 근데 우리 동지들을 살리려면 형님이 세게 도와주셔야 합니데이. 야마타반장을 없애버리고 난 뒤 우리 동지들은 형님을 신으로 봅니더”
“쓸데없는 소리...”

이수가 말을 끊어버리자 상덕은 좀 섭섭한 듯 입을 쩝쩝 다시며 그 답지 않게 고개를 젖히더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이수는 그의 멍해진 표정을 눈치 채고, 넌지시 캐물었다.
“지금도 경산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많을 긴데...”
“앗따 형님, 여자얘기 그만하자 카시더니......저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꺼...”
“자네 표정을 보니까 목 놓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한데...?”
“아이고, 우리 형님은 진짜 귀신이라 카이...우째 그리 남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십니꺼...”
“그 사람은 어디서 만났는데?”
“제가 만날 데가 달리 어디 있겠습니꺼...술집 밖에...일 년 전 제가 하는 술집에 앉아있는데 기생조달인 김상표가 청송처녀 하나를 데려왔데예...아버지가 노름빚을 심하게 져가 자기 딸을 팔아먹은 거라예...근데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애처롭기도 하고 반듯해 보이는 얼굴이 지 맘을 콱 휘어잡데예...그래서 그날로 당장 우리 집으로 데려가 살림차렸심더”
“아직 애는 없고?”
“아무래도 오늘 자꾸 생각이 나는 거보니...오늘 쯤 첫애가 태어났지 시픕니더...떠나올 때 배가 불렀거든예. 이렇게 끌려와있으이 아들이 태어났는지, 딸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덕의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그 물기 위에 남국의 별들이 반짝였다.
사실 이수는 도쿄에 살 때도 방학 때 집에 가려고 경산역에 내리면 항상 흰 와이셔츠에 새까만 양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바른 서상덕이 눈에 띄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다 헤진 군복에, 털북숭이가 된 채 눈물 머금고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장교 2명은 선실로 들어가고 군부동지들은 모두 갑판 여기저기에 드러누워 깊은 잠속에 빠져든 상태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이수와 상덕뿐이었다.

하지만 이수와 상덕도 술기운 탓인지 곧 잠에 빠져들었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이수가 눈을 떠보니 밤바다에 내려앉아 찰랑이던 별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빼서 이리저리 돌려보니 아직은 어둑하지만 수평선으로 먼동이 약간 비치고, 그 아래로 작은 섬들이 낙타의 등처럼 올록볼록 솟아올라 있었다. 서서히 뱃머리가 자마미 항구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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