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가 꿈꾼 ‘인생의 완성’

입력 2012-05-30 20:49 수정 2013-08-10 20:34






“무슨 축제가 있나요?”
“축제? 아냐, 장례식 소리야. 표정이 왜 그런가? 장례식은 본래 경사스런 일이야. 잘 살고 일 잘하고, 맘 편히 죽는 건 분명 경사지.”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가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꿈(夢, 1990)’의 마지막 에피소드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에 나오는 대화 내용입니다. 꿈속의 구로사와가 103세 노인을 만나 이 마을의 장례 행렬이 왜 축제 같은지 설명을 듣는 대목이지요.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지극히 유토피아적인 인식은 철저한 반문명적 생활에서 비롯된다는 얘기인데요. 노인은 말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편한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진실로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초와 등불로도 세상은 밝을 수 있다고. 물과 나무, 풀 외에는 어떤 겉치레도 필요 없다고, 충분히 자유롭다고요.








 ▲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

그리고 덧붙입니다. “죽은 사람은 내 첫 사랑이었는데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 99세 할머니야. 여기선 젊은 편에 속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말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구로사와는 비로소 인생을 관조하는 시선,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지요.

장례 행렬이 떠나고 홀로 남은 여행자 구로사와는 총총히 그 마을을 벗어납니다. 떠나는 그의 등 뒤로 홀연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화면에 빗금을 긋고 사라집니다.  ‘장자의 호접몽’이 연상되는 일순간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그리고 떠나는 나그네를 배웅하듯  느릿느릿 흐르는 개울의 클로즈 업. 맑은 물 아래 수초가 장엄하게 일렁이는데요. 꿈을 통해 진정으로 갈망하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이폴리토프 이바노프의  ‘코카사스의 풍경 - In a Village’가 흐르지요.






▲ Ippolitov-Ivanov(1859~1935) - from Caucasian Sketches Op.10, ‘In a Village’.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Ukraine. Arthur Fagen, conductor

저 유명한 ‘7인의 사무라이’를 비롯해 ‘요짐보’ ‘라쇼몽’ ‘츠바키 산주로’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역동적 내러티브와 장쾌한 스타일이 완전히 배제된, 구로사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서정적이며 회화적입니다. ‘여우비’ ‘복숭아 밭’ ‘까마귀’ 등 다른 에피소드들도 인간이 지녀야 할 희망의 색깔을 아름다운 영상 언어로 그리고 있지요. 말년의 감독이 이 영화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꿈




또 한 편의 구로사와 영화 ‘살다(Ikiru, 1952)’도 죽음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0년 간 시청 과장으로 틀에 박힌 공무원 생활을 하던 홀아비 주인공이 어느 날 위암이라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습니다. 한 집에 살며 자신을 홀대하는 아들 내외에게는 차마 병 얘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에게도 비밀로 하지요. 술집을 전전하며 만취해보기도 하고 젊은 여직원에게서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느껴보기도 하지만 모두 허탈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추진합니다. 가난한 지역 주민의 마을 웅덩이를 처리하고 그곳에 놀이터를 만드는 일로서 그간 시청의 어느 부서도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사안이지요. 여기서 전후 일본 공무원들의 복지 부동하는 자세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코미디 수준인데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a: 너는 왜 휴가를 아직도 가지 않니? 일이 그렇게 많니?
b: 아니.
a: 그럼, 니가 휴가 가면 빈 자리가 너무 티 날까봐 그러니?
b: 아니. 내가 휴가 가면, 내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드러날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장 조사를 하고 세부 공정을 일일이 체크하는 등 열과 성으로 작업을 진행시키지요. 상사들의 여전한 냉소, 폭력 조직의 개입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마침내 공사가 마무리되지만요. 자신이 만든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인생은 짧아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숨을 거두고 맙니다. 때맞춰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네요. 살았으되 죽어 있었던 삶.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저항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장벽을 쌓아 두지 말라.
온갖 사소한 충동, 강제와 욕구로부터
그리고 그 자질구레한 모든 갈등과 위선으로부터
진정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거라.
그러면 팔을 활짝 벌리고
삶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 크리슈나무르티 「명상집」 중에서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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