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곡괭이로 땅굴을 파며 받은 월급을 몽땅 털어 넣으면 뗏목 하나는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늦은 밤 뗏목을 타고 나하 외곽 해안에서 출발해 낮에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거나 다른 선박을 만나면 뗏목아래 잠수하고, 밤중에 힘차게 노를 저어 쿠로시오해류를 타면 이틀 뒤엔 우타가 근무하는 자마미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타를 만나면 일본군의 쾌속정을 훔쳐 필리핀의 작은 섬으로 함께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치카와 중대장은 눈치라도 챈 듯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서류작업을 시켰다. 연대본부에서 뭔가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 것 같은데, 중대장은 그 사실을 숨기고 소대장들에게 조차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혼자서만 분주히 본부를 들락거렸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103중대 3소대 전원에게 모든 군장을 챙기게 한 뒤 나하 항구에서 떨어져있는 나미노우에구(波上宮)앞 해안에 집결시켰다.
이치카와 중대장은 말없이 사라지더니 밤늦게 나타나 준비해둔 목선에 승선하라고 명령했다. 이수는 결국 탈영 기회를 잃어 축 늘어진 채 배에 올랐다.

“이봐, 자마미까지 얼마나 걸리지?”

깜깜해진 바다로 들어섰을 때 이치카와 중대장이 류큐인 선장에게 묻는 말소리가 바닷바람소리와 엔진소리 사이를 비집고 그의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이수는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어찔했다.

‘자마미라고?...정말, 지금 중대장이 자마미라고 말한 거지?’

자마미로 가기 위해 탈영을 무릅쓰기로 했는데......어이없이 이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자마미(座間味)’라는 뜻밖에 단어 하나가 귀를 뚫고 들어오자 지난 한 달간 절망에 못 이겨 늘어져 있던 이수의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자마미’란 마력적인 단어는 그의 심장에서 전기를 일으키더니 온몸으로 전류를 흘려보낸 뒤 머릿속 전구에 반짝 불을 켰다. 그 불빛은 동지나해의 찰랑이는 물결을 환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점점 더 밝아졌다. 그 불빛에 흔들리는 물결은 기대와 설렘의 파동이었다.

“그래, 정말 이 배가 자마미로 간다면, 앞으로 나는 이 세상의 어떠한 고난도 기꺼이 받아드릴 거야...!”

사실 이수는 우타와 헤어진 이후 살아있지 않았다. 그리움이 이렇게 지독한 고통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힘들고, 험악하고, 지루하고, 참기 어려웠다. 차라리 무거운 짐을 지고 옮길 때나 곡괭이질을 하느라 땀을 흘릴 때가 훨씬 편했다.

주체할 수 없이 가혹하고 격렬한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의 명령으로 식용식물 조사를 하러 갔을 때 우타와 혼인식을 올린 구스쿠다케에 가서 그때 영혼을 이식했던 가주마루 나무 두 그루를 캐와 부대 뒤 미도리가오카 기슭에 옮겨 심어놓고 틈만 나면 찾아가 그리움을 달랬다.

알고 보니 배고픔 보다 그리움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걸 처음으로 인지했다. 동지들도 항상 배고픔을 해결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이들도 고향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와 두고 온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배고픔을 더 심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수는 그리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1만 번을 말하면 하늘도 들어준다’는 인도속담을 기억해냈다. 그날부터 이수는 가혹한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자마미...자마미...자마미...자마미...”

24명의 군부들과 3명의 일본군을 태운 배는 나하 항구를 벗어나 검은 밤바다 위를 통통거리며 미끄러졌다. 이수는 오랜만에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오키나와에 온지 다섯 달이 넘었지만 남쪽나라 하늘에서 이렇게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린다는 사실을 느끼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 서이수는 나(이파)의 외삼촌이다. 오래전 그가 목선을 타고 불안하게 건넜던 뱃길을 이렇게 쾌속선으로 가고 있다>

아직도 오키나와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늘을 쳐다보는 게 두렵다.
하지만 그렇게 무수히 폭탄과 총알이 쏟아지던 그 하늘에 오늘은 주먹만큼 커다랗게 반짝이는 별들이 창호지문에 구멍을 뚫고 신혼 방을 들여다보듯 우리를 호기심에 차서 내려다보았다.

별들은 지난 10월 10일 공습으로 불타버린 시커먼 나하 항구 위에서 반짝이며 흔들리는 파도를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바다를 내려다보던 수많은 별들은 하늘에서 머물기엔 갑갑했던지 바다 수면으로 잔뜩 내려 앉아 이수가 타고 가는 뱃길의 잔잔한 수면 위에서 악보처럼 출렁였다.

그럼에도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이수 외엔 아무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조선인 군부 동지들에게 오키나와의 하늘은 몸서리치게 무서우니까.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때 하늘이란 오직 생명의 태양 빛과 단비를 내려주는 곳이라고 믿어왔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하늘은 생명을 앗아가는 파괴의 수단들을 내리퍼붓는 곳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군부들 가운데는 자다가 고함지르는 사람, 일하다가 소름에 끼쳐 땀 뻘뻘 흘리는 사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도 먹으면 토하고 또 토하는 사람,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탄다고 하소연하는 사람 등 갖가지 발작을 겪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하항에서 멀어질수록 바닷바람은 점점 크게 소리를 냈다. 이들 바람은 이수의 귓바퀴를 스치면서 처음엔 공포스럽게 울리더니 점점 타악기의 리듬처럼 흥겨운 소리를 냈다.

“바라바라 바락바락...발바락 발랄랄...”

지금까지 이수가 들어온 바람소리는 휭 또는 슁 하고 소리가 났지만, 이곳의 바람소리는 박자를 가진 신기한 음향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곧추세워 이제 이 바람의 박자에 따라 적어도 수만 번을 외쳤던 주문을 또 다시 외웠다.

“자마미, 자마미, 자마미, 자마미....”
‘우타가 말하길 나하에서 자마미까지는 배를 타고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목선으론 4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어쨌거나 시간은 상관없다. 우타를 한 번 더 만날 수만 있다면...’


이수는 양손을 뻗어 하늘로 향해 팔을 두어 번 내뻗었다. 물론 우타가 그 사이에 다른 섬으로 발령이 나서 가버렸다면 이수의 운명도 끝이겠지만, 우타를 단 한번 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거기에 목숨 거는 걸 주저하지 않겠다고 침 삼키며 다짐했다.

수상근무대 103중대 군부들이 벌써 일주일째 밤마다 몇 분대씩 사라졌는데 먼저 떠난 동지들도 자마미로 이동을 했다면, 우타도 이수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자마미섬 해안에서 밤 바닷바람 맞으며 매일 이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수는 다시 고개를 내밀어 그 큰 코로 바닷바람을 한참 동안 흡입한 뒤 편안한 자세로 길게 내뿜었다.

이수의 이런 이상한 행동이 건너편에 앉아있던 서상덕의 눈에 띄었다. 서상덕은 그 거구를 일으켜서더니 누워 자는 동지들을 툭툭 걷어차며 이수 옆자리로 와서 밀치고 앉았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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