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온 우타는 간호복 대신 정갈한 무늬의 류큐 가스리옷으로 갈아입었으며, 그녀의 오른 팔엔 보자기 두 개를 들고 왔고, 왼팔엔 오키나와 현악기 산신(三線)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산신을 연주하듯 세련되게 보자기를 풀더니 두 사람이 먹을 주먹밥과 젓갈 그리고 물통 2개를 꺼냈다.

이수가 구스쿠다케의 풀포기를 관찰하는데 빠져있는 동안 우타는 어느새 주먹밥에 반찬까지 정성을 다해 챙겨왔다.
이수가 풀밭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자, 우타는 왼팔로 이수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무릎에 털썩 걸터앉더니, 오른손으로 풀어진 보자기 속에서 주먹밥 하나를 꺼내 이수의 입속으로 쑥 밀어 넣었다.
이수가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자 그녀는 또 물통을 이수에게 내밀었다.
이수는 물통의 절반을 단숨에 비웠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핍박에 혹독하게 시달렸으며, 그 가운데서도 연약한 몸으로 노역하느라 고등여학교 학생들이 가장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고녀생이었던 우타는 그런 고초를 다 떨치고 맑은 표정으로 지금 이수의 무릎에 앉아있다. 더욱이 폭격이후 흰쌀을 살 방법이 없는데도 어디서 구해왔는지 하얀 쌀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이렇게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 일본군은 오키나와 고녀생들을 전쟁터로 끌어냈다...>

이수가 물을 다 마시자 그녀도 주먹밥 하나를 단숨에 목안으로 집어넣은 뒤 남은 물통을 다 비우더니 이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간호복엔 단추가 있었지만 오키나와 가스리엔 단추가 없어 그녀의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수가 고개를 조금 굽혀 그녀의 젖꼭지에 속눈썹을 가져다 대자 그 젖꼭지가 밝은 햇살에 후요꽃보다 더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는 머리를 조금 치켜들어 빛나는 꼭지를 입술로 깨물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바다바람이 두 사람을 거미줄처럼 휘어 감았다.

“이수씨, 우리 오늘 결혼해요!”
“응?...결혼?, 근데 결혼을 하려면 하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객요?, 이수씨에겐 꽃이 최고의 손님이잖아요, 여기 주변을 둘러봐요. 지금 엄청나게 많은 하객들이 모여 있잖아요.”
“하긴 그렇네...”

현실적으로 지금까지 이수는 우타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었고,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우타는 잠도 재워주고, 밥상도 차려주고, 우친과 협죽도 열매를 주었으며, 방금도 주먹밥을 챙겨왔다.

그런데 오늘 우타가 당장 결혼하자고 제의하자 미안한 감정이 서서히 이수의 가슴에 고이더니 결국 몸 밖으로 흘러넘쳤다.
지금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이수가 우타에게 줄 수 있는 건 이 이 구스쿠다케 비탈에 있는 꽃들뿐이었다.
이수는 벌떡 일어나 풀숲으로 성큼 걸어가서 나팔꽃 한 줄기를 꺾어와 커다란 후요꽃잎을 그 넝쿨에 정성스럽게 꿰어 화려한 ‘왕관’을 만들었다.

가스리를 입은 그녀가 ‘후요왕관’을 쓰자 어느새 나비 두 마리가 나타나 그녀의 왕관 주위를 맴돌았다. 꽃 왕관을 쓴 우타는 정갈했다. 눈 부셨다. 이수는 종이수첩을 꺼내 두 사람을 위해 작은 종이에 ‘혼인을 위한 서약서’을 작성했다.

이수는 이 결혼식을 ‘존재적 혼인’이라고 이름 지었다. 일반적인 혼인은 사망이나 이혼으로 소멸될 수도 있지만, ‘존재적 혼인’은 그 진정성이 불멸이어서 사람이 죽어도 이 땅의 풀 나무 같은 생명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붙였다.

이수는 이 ‘존재적 혼인’의 지속을 위해 아까 봐둔 한 뼘 크기의 가쥬마루나무 두 그루에 두 사람 영혼의 이식시켜놓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언덕 위로 올라가 두 그루의 새끼 가쥬마루 나무에 가서 오랫동안 눈을 감은 채 서서 영혼을 각자의 나무속으로 불어넣었다.

그건 두 사람의 몸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두 사람의 영혼을 간직한 가쥬마루가 전쟁이 끝난 뒤, 오키나와의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함께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수와 우타는 두 그루의 가주마루가 나중에 가지끼리 서로 결합해서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버린다는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 본디 2그루였으나 가지가 결합해 지금은 1그루가 된 가쥬마루......사진 이파>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두 사람은 지금 온 세상의 꽃과 나무와 하늘과 땅,그리고 ‘시간’에게 서로가 결합했음을 선언했다.

혼인식을 끝낸 뒤, 이 두 사람은 우타의 자취방으로 가서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육군병원에서 의료품을 받아서 103중대에 전달해야한다. 그 뒤엔 다시 헤어져야 한다.
이수는 나하에서 군수품을 하역하는 ‘노예’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고, 우타는 자마미섬으로 건너가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 진료소에서 부상병을 돌봐야 한다. 두 사람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건 앞으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고 또 희박하다는 것이다.

혼인식을 끝내자 우타는 보따리에서 또 다른 물건 하나를 꺼냈다. 오키나와 전통 술인 아와모리였다.

“혼인잔치 집엔 당연히 술이 나와야 하는 거죠?”

살펴보니 그녀는 술병만 가져왔지 술잔을 챙겨오지 못했다. 이수는 금방 후요 잎을 두 개를 뜯어 와서 그 이파리를 원추형으로 접어 술잔을 만들었다.

“우타, 이 아와모리를 사투리로는 뭐라고 부르지?”
“보통 아무이라고 하죠. 아버지는 아무이라고 했고, 엄마는 그냥 사키라고 했어요. 오늘처럼 결혼식에 쓰는 술은 사키무이(酒盛り)라고도 하죠.”
“그래? 이제 우리 사키무이를 마시자.”

두 사람은 나뭇잎 잔을 서로 부딪친 뒤 함께 화합주를 두어 번 들이켰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차츰 익어가자 우타는 옆에 놓아두었던 오키나와 현악기인 산신을 살그머니 품에 안고 뜯기 시작했다.
“이수씨, 이건 제가 작곡한 노래예요...”

산신의 선율 속에서 우타는 이수의 눈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주룩 눈물을 흘렸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과 혼인을 했지만 지금 흘리는 눈물은 진실로 행복한 눈물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뜻 깊은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로 혼인을 자축하는 것보다 더 가슴 저미도록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그녀는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가늘고 높은 음성으로 노래의 실타래를 풀어냈다.

운나다키아가타
사투간마라지마
무인우시누키티
구가타나사~나

(운나산 저 너머에
사랑하는 사람 마을 있네.
저 산을 밀쳐버리고
그 마을 끌어당기고 싶어라.)

산신을 뜯으며 부르는 우타의 노래는 옛 부터 내려오는 온나부시(恩納節)와 가사는 같았지만 선율은 원곡과 완전히 달랐다. 산신의 반주와 우타의 노래는 대위법(對位法)적이었으며, 그 맑고 선명한 애절함이 이수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전신이 희열에 떨게 만들었다.

그녀의 운율이 절정에 이르자, 구스쿠다케 동산이 약한 지진 난 듯 살짝 흔들렸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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