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들

입력 2012-02-20 20:06 수정 2014-02-01 23:39



동행이 있는 여행은 대개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반면 홀로 떠나는 길은 도중에 무엇을 보느냐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이 바로 그 장소’지요. 멀리 있어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은 이해의 크기에 의해 축소되지만 가까이 있는 것들은 실물 그대로 보이는 법.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정 붙여 눌러 앉고 싶은 느낌이 드는 곳을 발견했다면 그 여행은 일단 성공입니다. 일행이 있든 없든….

지난 주 찾았던 안동 하회마을 이웃의 병산서원이 그러한 곳입니다.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이곳은 막힌 듯 열려 있는 담장, 자연의 품에 안겼다가 끌어당기는 공간 배치가 절묘합니다. 그 중심에 휴식과 강학의 공간이었던 만대루(晩對樓)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목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곳으로 두보의 시에서 이름을 따왔다지요. 건너 편의 병산과 낙동강 줄기, 백사장을 바라보는 맛은 또 어떻고요. 그야말로 시간을 잊게 만듭니다. 




강은 차가운 산 전각을 지나고                                   江度寒山閣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城高絶塞樓
푸른 절벽은 늦을 녘에 마주 대할 만하고                    翠屛宜晩對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白谷會深遊
울 줄 아는 기러기 빠르디빠르고                                急急能鳴雁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 가볍디가볍다                          輕輕不下鷗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夷陵春色起
작은 배를 점점 띄우려 한다                                      漸擬放扁舟
- 두보 <백제성루 白帝城樓>

서원을 내려와 강변으로 들어섰습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을 끼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햇빛에 반사돼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순백의 사장. 바람도 잠시 숨을 죽였습니다. 글쎄요. 굳이 비유하자면 백석의 저 유명한 시구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기품을 지닌 여인과의 첫 대면?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고 억겁의 긴 세월을 기다려 온 것 같은…. ‘비경’이라는 상투적 예찬이 무례일 듯 싶었습니다. ‘도둑맞은 내 마음을 눈치 챘을까’ 눈길도 제대로 못 주었는데요. 조금만 더 뻔뻔했다면 강의 깊고 너른 치마 속을 파고들어 찌들대로 찌든 영혼의 때를 씻었을 겁니다.







“형, 이제 가입시더. 풍산장터서 묵 놓고 막걸리 한 잔 해야제.”

일행의 호출에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비포장 길을 벗어나자 들어올 때 봤던 강변의 포클레인과 트럭들이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병산서원 앞은 손을 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을 애써 잊으려 하는 걸까요. 타인이 자신의 일부임을 알기는 하는 걸까요. 탐욕과 무관심이 불러올 엄청난 재앙, 분노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대구를 베이스 캠프삼아 경주, 감포, 포항, 안동으로 이어졌던 4박5일간의 나들이. 한티 성지, 동촌 유원지, 감은사지, 괘릉, 불국사, 호미곶 등 부지런히 돌았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영혼이 부자인 ‘2남 2녀’ 시인들과의 여정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자 했던 귀한 만남으로 기록될 것이고요. 아무리 힘든 인생의 길이라도 동행하자는 약속의 메시지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일관되게 호소했던 위대한 가수 블라디미르 비쇼츠키의 노랫말처럼 생생하게 남아….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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