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입력 2012-01-19 14:01 수정 2012-01-19 15:46



루나 예나

김창식

살면서 자연스레 갖는 몇 가지 물음이 있다. 그 질문 중 하나만이라도 답의 언저리에 닿으면 '현자(賢者)'의 반열에 들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신(神)은 누구인가?"이다. 이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거대하고 광범위한 담론일 것이지만, 아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준 사람은 없다. 아니 "신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앞서 신이 존재하는지조차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어떤 이는 신을 보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누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신이 원래 있었는데 나중에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음 물음 역시 만만치 않다. 다름 아닌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몇 가지 정보로는 충분치 않다.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한참 들여다보아도 모습이 흐릿하기만 하다. 거울 속 얼굴은 마침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다운 나'의 모습은 근원적이고 선험적인 것 같기도 하다. 듣기로 불교에서는 "나를 찾으려면 나를 죽이고 용맹 정진하라" 권하고, 기독교에서는 처음부터 "나를 버린 채 절대자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두 종교의 입장이 비슷하여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나의 좌표와 위치가 바로 서야 다른 것과의 신실한 관계 맺음이 가능하리라 하는 점일 테지만…….

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높은 곳을 향해 갈구해야 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이제 말하려고 하는 '제3의 인물'은 실생활에서 삶의 질이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그 뿐 아니라 바로 옆에, 손닿는 거리에 존재한다. 그와의 친연성(親緣性) 정도에 따라 될 일이 아니 되기도 하고 안 될 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더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공고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허구적이고 취약하기도 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 엄청난 풍파가 몰아쳐 일순에 삶이 좌초되기도 한다.

한때 그는 열정과 흠모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 사람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리라 약속도 했었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내가 눈이 삐었지!" 다짐이 자조로 바뀌기도 하고, "그땐 왜 그랬을까?" 절로 한숨도 나온다. 만에 하나 그런 눈치를 보인다거나 말을 잘못 흘렸다간 되담지 못할 '말[言]'을 '말[斗]'로 되돌려 받고 쩔쩔매기도 한다. 단단한 받침목이 되리라 호언했던 장담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을 본다.  

그 사람은 고유한 인사고과 기준으로 반찬 가지 수를 마음대로 정하고 음식점에선 양푼 냉면을 선호한다. 전철 안에서 엉버텨 앉고, 출발하려는 버스에서 잽싸게 뛰어내리는 묘기도 선보인다. 함께 거리를 걷다 어깨에 손이라도 두르면 남세스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 뿐인가. 한번 토라지면 어긋난 관계를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려면 우선 안방을 "풀방구리 제 집 드나들듯" 하는 강아지 눈치를 살펴야 한다. 동물들은 권력의 이동이나 변화추이에 민감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 진전을 도모하려면 나보다 서열이 앞서 총애를 받는 강아지에게 밉보여서는 안 된다. 평소 내신 점수를 잘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고.

그 사람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재주도 지니고 있다.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들면서도 도대체 피곤한 기색이란 없다. 수틀리면 몇날 며칠 말이 없고, 빈말이라도 칭찬을 해주면 짐짓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다. 또 무슨 일을 하는지 노상 딸그락거린다. 표(表)가 안 나서 그렇지, 그래도 그렇지, 늘 무슨 일인가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보냐. 심지어 잠 잘 때도 무엇인가 한다. "푸푸" 작은 고래가 수증기를 내뿜는 듯한 잠꼬대. 가위에 눌리는지 간간히 신음소리도 낸다. 아니, 그 사람은 실은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어느 시인이 말하더라. "아내는 잠속에서 작게 우는 법을 배운다."고.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인가? 곰곰이 헤아려보니 그가 누군지 관심을 두기는커녕 한 번도 웅숭깊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그런 것이려니 당연하게만 여겼다. 이제 그 사람도 더 이상 꽃다운 나이가 아니건만. 루나 예나(Luna Llena)! 설핏 잠든, 밭이랑처럼 주름 잡힌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생각한다. 그 사람의 청춘을, 지난날을, 빛나던 젊음을 편취(騙取)한 자가 누구인가를. 나쁜 녀석!

* 루나 예나(Luna Llena): 만월(滿月)이라는 뜻. 라틴 그룹 로스 트레스 디아망테스가 부른 비가(悲歌)이지만 우리에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사랑스런 번안 제목으로 알려짐.







위 글은 친화적 달변의 수필가 김창식씨가 새로 펴낸 ‘안경점의 그레트헨’(이화문화출판사)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올곧은 사유와 반듯한 논리, 시적 서정이 어우러진 글을 써온 작가답게 개성이 넘치는 매력적 산문의 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이번 수필집에도 그리움의 미학, 삶의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네요.

“그는 과거에 대한 재생 화면을 통해 잊을 수 없는 동창생들과 그 시절에 만났던 아내와 직장 동료, 어릴 적 골목에서 뒹굴었던 개구쟁이들을 다시 본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작가 개인의 흘러가버린 역사지만 진한 노스탤지어를 환기시키며 서쪽 하늘의 저녁 노을을 바라보듯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김우종 문학평론가)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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