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장충단 공원' 그 후 40년

입력 2011-11-14 16:55 수정 2014-01-26 11:27



대중 가요계에는 이른바 ‘11월 악연설’이라는 괴담이 존재합니다. 유독 이달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많아 생긴 말인데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꺼림직할 정도입니다. 1995년 그룹 듀스의 김성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90년에는 ‘내 사랑 내 곁에’의 김현식이 간경화로 타계했습니다. ‘강병철과 삼태기’의 강병철이 88년 세상을 등졌고요. ‘사랑하기 때문에’의 25세 유재하가 87년 교통사고로, ‘이름 모를 소녀’의 김정호가 85년 폐결핵으로 요절했습니다.  

지난 7일 타계 40주기를 맞은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를 시작으로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 ‘향수’ 등 40여 곡을 히트시킨 그도 ‘죽음의 11월’을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신장병과 폐렴이 겹쳐 고통을 받다가 1971년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는데요. 그는 이승을 떠나기 2년 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한 일이다. 신장병은 1967년 11월에 처음 걸렸다. 그것이 재발된 것인데 공교롭게도 또 11월이다.” 정말 얄궂네요. 어떤 운명의 힘이라도 작용한 건지 발병과 재발, 사망 시점이 모두 같은 달이니까요. 

그는 가수 생활의 대부분을 병마에 시달린 탓에 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래했습니다. 때문에 긴 호흡을 포기하고 가사를 짧게 끊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의무감에다 자신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무리를 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의 한 극장에서는 사회자 등에 업힌 채 열창을 하는가 하면 장충체육관과 영등포 연흥극장에서는 1절만 부르고 피를 토하며 퇴장했습니다. 임종 직전으로 기억되는데요. 서울의 종암극장에서 휠체어에 앉아 힘겹게 노래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아요
당신이 먼저 가버린 뒤, 나 혼자 외로워지면
그때 빗속에 젖어, 서글픈 가로등 밑을
돌아서며 남몰래 흐느껴 울 안녕(「안녕」1절)”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씨는 ‘짧지만 강렬했던 삶, 그리고 전무후무한 음색과 창법이 새롭게 조명받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팬이 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에 있는 그의 묘소와 전국 각지의 기념비 앞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지요. 지난 달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비 내리는 부두’ 노래비와 흉상이 세워졌고요. 서울 석촌호수에서는 음악제, 용산에서는 ‘삼각지 배호 가요제’까지 열렸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 됐음에도 추모 열기가 오히려 뜨거워지고 있는 까닭은 뭘까요. 그를 좋아하는 시인 두 명의 해석을 들어 봅니다.


“배호의 노래 속에 나오는 장충단공원은 아픈 추억의 공간이다. 이곳은 늦가을 안개에 싸여 있고 누군가 낙엽송 고목에 젊은 날 새겨 놓은 사랑의 이름을 찾아와 그 글씨를 어루만지는 실루엣이 떠오른다. 이른바 유행가라고 부르는 대중가요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노래를 듣거나 부르다 보면 그 노래에 동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자신이 노래 가사 속의 주인공과 같다는 느낌에 빠르게 빠져드는 것이다.
배호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찾아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이름 하나를 추억하는 가상 체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충단공원은 배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추억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투병 중에 그가 취입한 노래를 들어보라! 숨이 차서 가사가 끊어지거나 힘겹게, 힘겹게 박자를 따라가는 반 박자 느린 슬픔을 들을 수 있고 그런 슬픔이 우리를 배호의 노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시인 정일근) - 김선영 지음 <배호평전>(소담출판사, 2005) 

“배호는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근대적 가난이 평등하게 실현되어 있던 60년대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시대 기호이다.
(…)
배호의 서울은 근대화된 도시의 편리와 풍요를 거머쥐고 그것을 즐기는 상류층의 그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올라온 실향의 슬픔과 삶의 대책 없음에 허덕이며 어두운 뒷골목을 막막하게 배회하는 무단 상경자들의 서울이다. 그의 노래에는 늘 비가 축축하게 내리고 있고 비에 젖어 한숨을 토해내거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 있다.
(…)
그들은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빈 자리에서 상처 난 짐승이 제 상처를 핥듯 제 운명의 불우함과 혼자 남은 자의 속깊은 외로움을 반추한다. 그의 흐느끼는 듯한 저음의 트로트 선율에 실려 있는 외로움, 탄식, 아쉬움, 헐벗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메시지들은 60년대 서울의 화려함과 희망으로부터 밀려나 있는 자들의 그것을 대변하며 그 정조는 가슴을 찌르며 파고들었다.”(시인 장석주) - 위의 책에서 인용.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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