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씨, 이수씨는 오키나와에 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뭐예요?”
“그야, 당연히 새로운 식물들을 찾아내는 거지”
“그렇죠?,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일을 해요. 시간이 오늘 하루밖에 없지만 이수씨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제게도 정말 행복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한다면 나야 좋지만, 우타가 좀 심심할 텐데....”
“아니에요. 우리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 하루밖에 없을 수도 있는데...이 방안에서 그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우타의 시간을 내가 빼앗는 것 같아서......”

“빼앗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기는 거죠. 아름다운 하루를 함께 만끽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누워있는 이 구스쿠다케의 비탈은 이하후유 선생님이 어릴 때부터 뛰어놀며 식물채집을 하던 곳이고, 나도 어릴 때 여기서 온종일 꽃을 찾아다녔으니까요.”
“그렇네......”
“이 구스쿠다케에서 자라는 꽃의 이름은 저도 대부분 다 알아요. 아,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이하후유도 어릴 땐 식물학자가 되고 싶어 했데요”
“진짜?, 그건...처음 듣는 얘기네...”

이수와 우타는 폭서산장의 문을 밀어 체치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 그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중이다>

구스쿠다케는 10월인데도 강렬한 소나기 햇볕이 내려쬐고 나무들은 여전히 짙푸르렀다. 두 사람은 위쪽으로 올라가려다 아주 연한 분홍 꽃을 뒤집어쓴 2m정도 높이의 나무 꽃나무 한그루를 발견하고 그 나무 앞에 나란히 섰다. 그 나무는 하이비스커스의 일종이었다.


“우타, 류큐에선 이 꽃을 뭐라고 부르지?”
“이거요? 정식 이름은 사키시마후요(先島芙蓉)인데, 그냥 ‘후요’라고 불러요. 사투리로는 ‘후유’라고도 하는데, 이 나무는 누가 가져다 심은 게 아니라 야생이예요.”
“아, 참...멋드러지게 피었네...!”
“이수씨, 이 나무의 학명이 뭔지 아세요?”
“응? 이거, 하이비스커스 마키노이(hibiscus makinoi)인 것 같은데...”
“어?, 역시 식물학자시네. 저는 세상에서 학명을 아는 유일한 식물이 바로 이 나무예요. 아버지가 가르쳐주셨죠. 오키나와에선 이 나무줄기로 오징어낚시 미끼를 만들어 쓰기도 해요...”
“그래? 그건 몰랐네...”

“이수씨, 그런데 이 꽃은 무슨 과에 속해요?”
“이거?...이건 아욱과에 속하는데, 이 꽃은 무궁화와 목화 양쪽을 반반씩 닮아 있지?...무궁화와 목화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꽃이 태어날 것 같아...”
“그러게요...”
“우타, 이 꽃 하나하나는 우리 두 사람처럼 앞으로 하루만 자유를 누릴 수 있어. 내일이면 이 꽃들은 다 떨어지고, 또 다른 꽃들이 이 나무 위를 장식하게 되지. 그런데도 이 꽃들은 불안해하기는커녕, 이렇게 활짝 펴서 맘껏 햇볕을 즐기잖아?...우리도 오늘은 전쟁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이 꽃들처럼 신나게 놀자!”
“하하, 너무 좋아요...근데, 이수씨...제가 사는 자취방이 바로 저 아래 나하 제2중학교 건너편에 있는데, 잠시만 다녀와도 되겠죠?.”
“응?, 그래?...나도 같이 갈까?”
“아뇨, 혼자서 다녀올게요.”

우타가 자리를 비우자 이수는 후요의 꽃모양에 빠져들었다. 먼저 이 꽃의 꽃술부터 살폈다. 이 꽃은 5개의 꽃잎 중앙에 암술을 안테나처럼 높게 설치해놓았고, 이 암술꼭지에 달린 5개의 연두색 망울은 수신 장치 같았다.

‘이 꽃은 왜 이렇게 꽃술을 안테나처럼 높게 세웠을까? 대체 암술이 이렇게 높아야 할 까닭이 있나? 혹시 이 꽃술은 공기 속에 퍼져나가는 여러 파동을 알아차리기 위해 이렇게 꽃술을 높이 세워놓은 게 아닐까?’

지금 이 꽃이 알고 있는 정보를 우리가 알아차리진 못하지만, 이 꽃은 이미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갖가지 정보를 인지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수는 살면서 동물보다 식물이 월등한 인지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했으며, 식물들이 빛을 활용하는 능력, 다시 말해 광합성을 하는 능력만 봐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걸 알고 있었다.
식물은 지구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생물이고, 사람보다 10배 이상 더 오래 사는 나무도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꽃의 안테나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몰라......모든 꽃은 저 가키노하나 언덕에 있는 기상대의 안테나와 같은 기능을 가졌을는지도......여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팔꽃도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잖은가...언제 해가 지는지, 오늘의 습도가 얼마인지,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부는지 완벽하게 감지한 뒤 가장 합당한 시간에 꽃잎을 활짝 여니까.’

그런 뜻에서 이수는 이 하이비스커스 마키노이를 ‘하이비스커스 안테나’라고 개명해주었다.
이 하이비스커스 마키노이란 학명은 일본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가 붙인 것이다. 그가 이 학명을 붙여주기 이전에도 후요란 꽃의 이름은 엄연히 있었음에도 그는 오키나와식 이름을 따르지 않고 이 꽃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수는 도쿄대 식물학교실에서 선배인 마키노 교수와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의 신조는 ‘잡초란 이름의 풀은 없다’라는 거였다.
근데, 문제는 그는 자기가 발견한 잡초마다 욕심 많게 자기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자들이 발견해서 표본실로 가져온 풀들도 며칠 지난 뒤 자신이 찾아가 확인하고서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수는 마키노 교수의 열정엔 감동했지만, 그를 존경하진 않았다.

마키노 교수는 틈만 나면 자기 자랑을 잘 늘어놓았는데 그는 고치현에서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나 두 살에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여섯 살엔 할아버지마저 떠나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새 이름을 달아주었는데, 본래는 세이타로(成太郞)였지만, 도미타로(富太郞)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본래의 자신의 이름을 바꾼 뒤부터 삶이 잘 풀렸다고 생각한 탓에 식물의 이름을 바꿔주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일본과 조선반도에 사는 그 많은 잡초와 나무의 이름을 끊임없이 바꾸었다.
그는 식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정식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는데도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식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열정도 대단해서 이수의 고향마을 앞에 500년째 서 있는 한반도 특유의 ‘느티나무(zelkova serrata makino)’에게 조차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수는 우타가 없는 사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종이수첩을 꺼내 구스쿠다케의 풀과 나무를 조사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풀 속에 얼굴을 집어넣은 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종이에 연필로 스케치하기에 바빴다.

“이수씨, 저 왔어요!”

이수는 풀포기들을 스케치하는데 정신이 팔려 우타의 부재를 잠깐 잊고 있었는데, 우타가 이수의 이런 태도를 놓칠 리 없었다.

“이수씨, 꽃들과 노느라, 제가 없어진지도 몰랐죠?”

이수는 눈치 빠른 우타에게 변명을 하기보다는 그냥 입을 벌쭉하게 벌린 채 가식 없는 머뭇거림으로 때웠다. 그는 높은 코를 쥐어뜯으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멀끔히 우타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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