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 좋았던’ 당신

입력 2011-06-03 19:24 수정 2011-06-07 11:28



엊그제 한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까칠했던(?) 젊은 시절을 어렵게 견뎌냈던 그는 내조 잘 하는 아내와 듬직한 남매를 남겨둔 채 그만 62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암 판정을 받은 지 10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해 조문객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는데요. 불과 석 달 전 ‘이젠 치료를 그만받겠다’고 선언하던 얼굴이 영정사진과 겹쳐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신은 왜 이렇게 ‘이제야 행복이 어슴푸레 짚이는’ 사람들을 급히 부르는 걸까요. 애당초 ‘어디 살 수 있으면 살아봐라’는 투로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툭 내던져놓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지금와서 무슨 용무로 그토록 잔인하게 데려가는 건지요. 투박하지만 거짓 없고 부족하지만 언제나 감사히 여겼던 이들의 때 늦은 즐거움이 그리도 샘이 났을까요. 아무리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다를 바 없다지만….



‘…/ 꿈은 평등한 거야/ 나 괴로운 일 있었어도 살아 있어 좋았어/ 당신도 약해지지 마’( - 시바타 도요「약해지지 마」)

만 100세를 거뜬히 넘긴 일본의 시인 할머니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미곡상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어 온갖 고생을 다하며 성장한 그녀가 남은 시간을 시작 활동으로 보내고 있다지요. ‘살아 있어 좋았어’라는 비범한(?) 시구가 자꾸 뇌리에 박혀 오는데… 아파트 입구 담장을 뒤덮은 덩굴장미가 그날따라 왜 그리 붉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용문산에서 공수한 지평막걸리
원액 그대로 살아 있어요
낮술도 좋네요 걸쭉할수록
목젖 타고 번지며 수시로 체위 바꾸고
찰지게 조였다 흐드러지게 풀리는 쾌감
사발에 묻어나는 외로운 타액의 성감대만큼
순도와 밀도 높은 즐거움 드리겠어요
동백아가씨
슬퍼서 붉은 입술로

여기는 봉천고개 하늘카페
관악구와 동작구가 나뉘는 달동네 언덕이지만요
한 잔 술 들어가는 곳이 세상사의 해방구임을
우리 세포가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상
등 맞대고 섰다 해서 뜨거운 피 못 흐를까요
경허 선사가 몹쓸 병 걸린 여인 팔베개하고
다미안 신부가 문둥이 되어 ‘형제여’ 했으니
성과 속은 한 통속, 그러니
가득 채운 이 한 잔이 오늘의 말씀이고
달구어진 이 몸이 지금 사랑이에요

아까 올라오던 산보객 이제 내려가네요
찬 바람에 취기도 곧 반환점
더는 못 참겠어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여과 없는 그리움의 젓가락 장단에 가슴 멍들면

언덕 아래 아파트촌 불빛 하나 둘 들어오네요
동백 꽃망울 터지듯

     - 졸시「하늘카페의 동백아가씨」전문(월간『우리詩』5월호, 2011). 
       이 시는 예전에 올린 동명의 칼럼을 소재로 썼습니다.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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