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입력 2011-03-31 18:19 수정 2011-04-02 20:32



지난 주말 서울의 모 대학에서 열린 계간<시에> 새봄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소속 회원 70명과 초대 손님을 포함, 모두 130여 명이 모인 자리였지요. 신인상 수상과 시 낭송, 잡지 출간 축하 등의 행사가 있었고 곧 화끈한 뒤풀이가 이어졌는데요.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대부분 들떤 표정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잔을 부딪치는 모습들이 왜 그리 정겨워 보이던지…. 조심조심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공식 행사가 끝난 오후 7시께만 해도 ‘2차’까지만 갈 요량으로 일행을 따라나섰지요. 2%가 부족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60여 명이 노래방 룸 세 개를 빼곡히 메웠습니다. 근데 노래방이 노래만 부르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마이크의 손바뀜과 회전하는 조명의 속도만큼 외로운 술잔도 돌고 돌아, 마침내 다수가 대오에서 탈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20여 명. 허기진 마음을 이기지 못했는지 모두들 힘차게 ‘3차’를 외쳤습니다. 택시를 나눠타고 향한 음식점은 시인 모씨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요. 그곳이 우리의 ‘공동묘지’가 될 줄이야.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시체 10여 구’가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나…. 찬물을 들이켜고 화장실을 다녀와 담배를 물고 앉아 있는데 주인이 문을 열고 때이른 출근을 했습니다. 어제 밤엔 정말 대단했다고 놀리더군요. 한 명씩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이 볼 만했다나요. 기적처럼 소생한 우리는 얼굴이 달아오를 겨를도 없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몇 명은 패잔병처럼 집으로 향하고요. 최후의 전사는 문학회장을 포함한 5명. 지방 사는 이들을 배웅하러 서울역까지 갔더랬지요. 

서운함을 애써 감추고 설익은 농을 주고 받으며 기차 시각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청도 운문사로 미나리 먹으러 가자고 운을 뗐습니다. 청정지역에서 키우는 무농해라 피로가 싹 가신다는 유혹이었는데요. 사람 마음 참 간사하데요.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미나리에 넘어가는 척한 겁니다. 헤어지기 싫어서…. 휘적휘적 올라탄 기차에서 단잠을 잔 일행은 운문사 구경을 하고 대구로 와 다음 날 새벽 두 시까지 또 술판을 벌였습니다. 싱싱한 미나리가 푸짐하게 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지요. 

초주검에 가까웠던 2박3일의 일탈. ‘데드 포인트’를 넘어서니 그곳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작시 한 편 올립니다.


잠실역 계단 아래 파리바게뜨
미각보다 후각이 즐거운 빵집이 있어요 이른 아침
당분을 먹은 이스트의 마술에
지평선 일출처럼 곰지락곰지락
반죽 부풀어 오르는 소리도 고소한데요

고로케, 소보로, 식빵, 케이크, 카스테라, 단팥빵
삼삼오오 군침 돌게 만드는 진열대 앞에
유니섹스 스타일의 걸인 남녀 셋
갓 구워낸 빵 냄새를 훔칠 때

반대편 코너를 막 돌아나온 젊은 여자 몇
땟국물 시큼한 분자의 습격에 얼굴 뒤틀려
손사래 치며 급히 에둘러 가는 모습
정나미가 뚝 떨어지데요 근데 정말 

철딱서니 없기로 나만 할까요
덜 발효된 빵집아이, 공장과 붙은 단칸방에 누워
새벽을 깨우는 반죽소리 시끄럽다며
달걀, 설탕, 베이킹파우더, 우유, 오일, 소금, 물
잘 배합된 양동이 속에
반항과 치기로 범벅된 불순물
서너 스푼 던져 넣고

밀가루 뒤집어쓴 책장 속 활자에
공부때 안 묻었다 비웃듯 들러붙은
빵 냄새가 싫어
교복 올올이 스며들어 불량스럽게 개기는
단내가 창피해
담임 선생님 가정방문 어떡하면 막을까
되먹지 않는 꼼수도 부렸지요

출구가 보이네요
여기까지 돌아와서야 알겠어요
오늘 이나마 배 안 곯고 등 따숩게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삶
온도 조절 가능한 것이 바로 

그 알싸한 냄새 덕분임을 

                - 졸시「그 냄새」전문 (문학무크『시에티카』제4호, 2011)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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