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록 우리가 힘들더라도…

입력 2010-05-18 15:56 수정 2010-07-18 14:12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얼마 전 타계한 원로가수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의 첫 구절입니다. 이 노래는 이미자, 한영애, 장사익, 금과은 등 가요계 후배들이 자신만의 목소리와 창법으로 리메이크했던,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곡이지요. 착착 달라붙는 트로트, 주술적 퇴폐미의 블루스, 쥐어짜는 호소력의 창(唱), 절묘한 화음의 포크로 각기 주법만 다를 뿐 한 많은 한국인의 정서를 파고드는 것은 한결 같습니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1위’라는 조사도 있습니다. 천양희 선생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이란 대목에서 목이 멘다고 고백했습니다. 고은은 이렇게 인용했지요. ‘꽃들 지고 있다/ (…)/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다/ 봄날은 간다’고 말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동명 영화도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싸늘해진 애인에게 말하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래도 여자는 단호합니다. “헤어져.”

그렇게 봄은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문학계에는 행사가 집중적으로 열렸는데요.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 현대불교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등. 오라는 덴 없어도 갈 곳은 있어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다보니 그만 지상의 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알뜰한 그 맹세’와 ‘실없는 그 기약’에 마음 뺏기고 말았습니다. ‘얄궂은 노래’에 속고 아리송한 세상에 속고….

하지만 다시 기다리렵니다.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이 됐을지라도, 꽃과 별이 지고 한없이 슬퍼져서 우리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더라도, 발 딛고 선 이 땅이 꺼져 폐허가 됐을지라도…. 옷고름 씹어가며, 꽃편지 내던지며, 앙가슴 두드리며 기다릴 겁니다. 성황당 길에서, 역마차 길에서, 신작로 길에서…. 진정 다시 올 우리의 봄을.

'2010 윤동주문학대상'을 받은 도종환 시인의 수상작 중 한 편을 계간 <서시> 작품집에서 발췌, 소개합니다. 심사를 한 유안진 선생은 고통 없이는 어떤 재탄생도 불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작품이라며 오랜만에 울어보는 행복에 빠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   진 / 도종환

우리가 세운 세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찬장의 그릇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명을 지르고
전등이 불빛과 함께 휘청거릴 때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몰랐다
우리가 지은 집 우리가 세운 마을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폐허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여진이 몇 차례 더 계곡과 강물을 흔들고 갔지만
먼지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풀이 돋기 전에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종을 울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숲과 새와 짐승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노천 물이 끓으며 보내던 경고의 소리
아래로부터 옛 성곽을 기울게 하던 미세한 진동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야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
충격과 지진은 언제든 다시 밀려올 수 있고
우리도 전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등을 밝히고
떨리는 손을 모두어 힘차게 못질을 해야 한다
세상은 지진으로 영원히 멈추지 않으므로
                                            
                                       ㅡ <문학사상> 3월호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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