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 근데 왜 하루 늦게 면회를 왔지? 정말,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하아, 이수씨. 사연이 많아요. 이수씨와 헤어지고, 제가 근무하는 가이난중학교에 있는 오키나와육군병원에 갔더니, 폭격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린 거예요. 병원본부는 복구하는 데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가까이 있는 하에바루국민학교로 병원을 옮겼어요.”
“장비들을 옮기느라 엄청 힘들었겠네.”

“장비라고 해봐야 수술용 도구와 몇몇 의료기구외엔 모두 불타버렸어요...”
“그럼 부상병들은 어떻게 다 수용했어?”
“수술용 침대가 없어 책상을 붙여 그 위에 부상자를 눕히고 수술했어요. 우리 육군병원은 외과, 내과, 전염병과, 이렇게 3과가 있는데, 저는 외과 소속이에요. 근데 외과 수술을 해야 할 부상자가 100명이 넘었어요. 수술을 시작하자 잘라낸 팔과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날씨가 이래서 금방 부패했을 텐데...”
“제가 태어나 사람의 살이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한 건 없다는 걸 처음 알았죠. 남자 의무대원들도 피범벅이 된 고약한 냄새가 나는 팔다리를 옮길 생각을 못하데요. 그래서 제가 자발적으로 잘린 팔다리를 포대에 넣어 옮기는 일을 했어요.”

“아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이수씨, 자책하지 마셔요. 지금은 전쟁 중이잖아요”
“그 지독한 냄새를 어떻게 참아냈지?”
“다 이수씨 덕분이죠.”
“그게 무슨 뜻이지?”
“이수씨가 저번에 말씀했잖아요. 죽은 나무에선 은은한 냄새가 나는데, 죽은 사람은 혹독한 냄새가 난다고요...”
“그래, 그게 사람과 나무의 차이점이지...”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나도 그 까닭을 찾고 있는 중이야. 아마, 신께서 사람들이 피 냄새를 싫어하게 만든 건 가능한 한 피 흘리는 일을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이겠지.”

“하지만 이미 흘러버린 피는 어쩔 수 없잖아요......저는 잘라낸 팔다리를 나뭇가지라고 생각했어요. 가지를 잘라내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는 나무가 있듯이, 팔다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잘라낸 부상병의 팔과 다리가 ‘나뭇가지’라고 여기니까, 냄새를 참아낼 수 있었어요. 그 일을 잘 한 덕분에 이렇게 외출허락도 받아낸 거예요.”

< 오키나와의 상징인 데이고나무의 꽃. 참 피빛이 진하다.>

이수는 벗은 채 폭서산방에 드러누워 앉아있는 우타의 손을 꼭 쥐고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빨아들였다.
폭서산방의 곰팡이 냄새는 우타의 ‘피냄새’를 씻어주기에 알맞았다. 곰팡이 냄새는 항상 ‘음습함’을 연상시키는데 오늘 이 폭서산방의 곰팡이 냄새는 뭐랄까, 참혹함과 공허함을 몰아내는 독특한 향기였다.

사실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술인 ‘아와모리(泡盛)’도 곰팡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곰팡이의 이름은 아스페르길루스 아와모리(aspergillus awamori)인데, 이 곰팡이가 오키나와만의 맛깔난 술을 만들어냈다.

이하후유에 따르면 아와모리란 ‘좁쌀’을 뜻하는 아와(粟)에서 왔다고 하는데, 옛날엔 쌀이 귀해서 아와모리를 빚을 때 좁쌀을 넣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그의 주장. 풋풋한 곰팡이 냄새를 맡다가 이수는 ‘지금 내가 곰팡이라면...’하고 상상을 해봤다.

지금으로선 곰팡이의 ‘존재’보다 훨씬 못한 것 같았다. 곰팡이를 피울 만큼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이제 또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남은 20시간을 월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앞으로 살아있는 이 몇 시간을 극대화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굶어 죽을 때까지 이대로 폭서산방에 그냥 누워있어도 괜찮겠지?’

이 폭서산방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벌목당한 나무 등걸처럼 어떤 빛에도 반응하지 않고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전쟁으로 구속되고 제약된 이 조건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몇 시간의 희열을 느낄만한 자유를 얻었는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나에게만 배려해준 하늘의 뜻을 등지는 게 아닐까?

그런데 대체 나는 지금 뭘 해야 할까? 이 곰팡이 속에서 몸을 아예 움직이지 않고, 정신적 자유만 즐기는 게 옳을까?’

이수가 선택을 망설이고 있는 동안 우타는 먼저 몸을 일으키더니 구석에 놓인 옷을 털어 조용히 입기 시작했다.
이수는 문 틈새로 비치는 뿌연 햇살에 선명히 드러나는 우타의 몸 곡선을 받아들였다. 먼저 옷을 입은 우타는 하얀 곰팡이가 묻은 이수의 옷을 정성껏 털더니 바지부터 입혀주기 시작했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 (주)기업&미디어 대표.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장에서 취재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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