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와 이수의 몸은 강한 고무줄 끈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우타가 먼저 달려가면 이수는 좀 버텨봤는데도 그 끈의 신축적인 당김에 의해 이수도 따라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턱대고 앞으로 내달리는 우타를 따라잡기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이수는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을 끊어버릴 순 없었다. 이수에게 그 끈은 숙명이었다.

< 사람은 끈으로 이어져 있다...사진=카셀 도큐멘타에서 이파>

우타는 폭격으로 담벼락들이 다 무너져 본디 있던 골목이 어딘지를 분간하기 어려운데도 사방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담을 절대 밟지 않고 잘 빠져나갔다.
골목이 막혀있는 곳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신나게 팔짝팔짝 뛰며 옆 골목으로 돌아 계속 앞장서서 내달렸고, 그녀가 묶어놓은 끈에 의해 이수는 늘어졌다 당겨졌다 하며 계속 그녀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타는 나하 제2중학교 앞에 이르자 홱 돌아서서 방긋 웃더니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선 오른쪽으로 돌아 나무숲으로 뒤덮인 구스쿠다케(城嶽)쪽으로 올라갔다. 구스쿠다케는 나하 시내에 자리 잡은 작은 언덕으로 이 도시에서 아직 폭격에 훼손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이수는 나하에 도착한 날로부터 먼발치에 보이는 구스쿠다케를 꼭 한번 답사하고 싶었는데 우타가 어떻게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짜고짜 그를 끈으로 묶어 이곳 구스쿠다케 아래로 이끌고 와버린 셈이다.
그런데 우타는 구스쿠다케 언덕 위로 올라가지 않고 서쪽 기슭에 이르자 갑자기 발걸음을 딱 멈췄다.

“이수씨, 제가 가자고 한 곳이 바로 여기예요”
“여기가 어딘데?”
“폭서산방(曝書山房)이란 곳이에요.”
“이하후유의 폭서산방?”
“네에..!”
“근데, 우타가 폭서산방을 어떻게 알지?”
“그러는 이수씨는 어떻게 알아요?”
“아, 아까 얘기했지만, 나는 이하후휴가 여기서 쓴 책들을 읽었으니까”
“저는, 아버지를 따라 이 언덕에 수없이 왔으니까요.”

이하후유는 도쿄제대를 졸업한 뒤 곧장 고향인 오키나와로 내려와 오키나와도서관장 자리를 맡았고, 예수에 심취한 그는 이 ‘폭서산방’에서 ‘크리스트조합’을 만들어 후배들과 토론을 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근데 그 장소가 이렇게 작고 초라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산장은 이번 미군 폭격에 불타진 않았는데, 류큐식 기와집으로 만든 집은 10여 평 정도 되어 보였고, ‘산장’이라기보다 ‘원두막’에 가까웠다.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이 기와사이에 석회를 두텁게 바른 지붕 위를 덮은 데다 지붕틈새에서 풀들이 솟아나고, 마루에선 곰팡이냄새가 진동했다.

이수는 이하후유가 후배들과 토론을 벌이던 방안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들어가는 문은 낡은 판자로 된 덧문인데 오래전부터 굳게 닫혀있었고, 덧문 중앙엔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수씨. 이하후유 선생님은 이 집에서 우리 아버지랑...그리고 나하의 후배들에게 류큐의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곤 했데요. 근데 이하후유 선생님이 도쿄로 떠난 뒤 이 집이 팔려버렸는데도, 후배들은 이곳 구스쿠다케 언덕에 모여 계속 모임을 가졌어요. 근데 지금은... 여기서 함께 모이던 사람들 모두가 전쟁터로, 피난처로 떠나는 바람에 이렇게 헐벗어진 거예요.”

우타는 선천적으로 참 겁이 없었다. 그녀는 대뜸 옛 폭서산방의 덧문으로 다가가더니 판자로 된 문짝을 세차게 발로 찬 뒤 마구 흔든 뒤 확 밀어제쳤다.
그러자 자물쇠가 뚝 떨어져 나가며 옆으로 밀도록 된 덧문이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 삐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 사람은 덧문 틈새로 도둑고양이처럼 기어들어가 이하후유가 젊은 시절을 후배들과 함께 보낸 폭서산방 안에 들어섰다.

“하아, 폭서란 ‘바람에 책을 말린다’는 뜻인데...”
“이수씨, 지금 우리는 말릴 책이 없으니까, 몸이나 말려요”

우타는 언제나 뜻밖의 지혜를 쏟아냈다.

‘그래, 우타의 말이 맞아. 우리는 여기서 몸이나 말리자. 책?...지금 살아있는 우리 두 사람의 몸보다 더 존재적인 책이 있을까?...이하후유는 이 방안에서 류큐의 시가인 ‘오모로소시’를 연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지만, 우리는 지금 오직 이 몸뚱이를 말리며 오모로소시를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하후유가 오키나와의 민속과 언어를 해석해내는데 땀 흘린 이 방에 들어와 책은 아니지만 몸을 말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수의 가슴은 들떴다.

“이수씨, 제가 이 집의 문을 부서지도록 세차게 밀치니까 놀랐죠?”
“응, 좀...남의 집이니까”
“걱정 마셔요. 제가 이 집주인을 잘 아니까요. 근데 이 집은 오늘이 아니면 다시 볼 수 없을 거예요...”
“왜?”
“곧 헐리니까요...”
“뭐?, 이 집이 헐린다고?”
“네, 하에바루 야전병원에 나하 출신 군의관이 한사람 있는데, 그분 말씀이 곧 여기에 제 32군 야마(山)부대에서 호를 뚫을 계획이랍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왼쪽을 한번 살펴보세요.”

우타의 말을 듣고 문틈으로 내다보니까 아직 야마부대가 호를 뚫는 작업을 개시하진 않았지만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근처를 끈으로 둘러쳐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 현재 공원으로 변모한 구스쿠다케...사진=이파>

이 집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듣자, 또 한 차례의 낙망감과 소멸에 대한 허망함으로 헝클어진 가시넝쿨이 온몸을 할퀴고 지나가더니, 그 가시넝쿨은 이수의 포말 같은 갈망을 터뜨리려고 턱 하니 이수 앞을 막아섰다.
그는 갈망을 포기한 뒤, 그나마 가시에 할퀸 생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폭서산방에 두텁게 쌓인 먼지를 깔판삼아 바닥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수를 쳐다보던 우타도 머릿속을 따갑게 찌르는 탱자가시를 뽑아내듯 머리카락에 꽂인 핀을 차례로 뽑아낸 뒤 머리카락을 완전히 풀어헤치더니 그의 몸 위에 풀썩 엎어졌다.
오늘 우타의 입술은 며칠 전보다 훨씬 더 탱탱하고 매끄러웠다. 입맞춤은 두 사람에게 꽂인 가시들을 뽑는 수단이 되었다.

우타는 이수의 옷에 꽂인 ‘가시’들을 털어내기 위해 이수의 윗옷 단추를 차례로 풀더니 옷을 벗겨 먼지 나게 툴툴 털더니 방구석으로 저편으로 던졌다.
이번엔 가시 돋친 자신의 윗도리를 빠른 속도로 벗어 이수의 윗도리 위로 휙 내동댕이쳤다.

드러난 우타의 가슴은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높이 솟아올랐고, 그 가슴이 짓누르는 팽만감은 이수가 숨을 가눌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우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자, 우타는 더 적극적으로 이수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수는 생각했다. 앞으로 어디 이 폭서산방만 없어질까? 이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풀, 꽃, 나무, 집 그리고 사람들...결국 살아있는 우리 두 사람조차 화염에 불타고, 폭탄에 흩어져 회색재로 날릴 게 뻔하지 않은가.

곧 회색재로 흩어질 이 가슴과 가슴사이,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가 이렇게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생생하고, 탱탱하고, 매끄러운 그 틈바구니로 들어가자 탈출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죽자...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 행복하게 죽어버리자’
그래도 두 사람은 단번에 죽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텼다. 첫 번째 폭풍우가 몰려왔지만, 난파선에 올라탄 두 사람은 전복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또 애를 썼다.
그렇지만 두 번째 폭풍우가 밀려오자 두 사람은 도저히 난파선의 밧줄을 끝까지 잡지 못해 손을 놓치고 말았다.

소멸만큼 불행한 건 없지만, 이렇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만큼 행복하게 소멸할 수도 있다니...두 사람의 몸뚱이가 소멸해버리고 한참 뒤...잠에서 깨어나자 아까까지 몰랐던 곰팡이 냄새가 서서히 두 사람의 코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곰팡이 냄새는 또 다른 소생을 예고했다. 그 소생은 생기 있고 투명한 맛이었다.

이수의 땀 냄새, 우타의 피부 냄새, 그리고 곰팡이의 짙은 냄새가 함께 서로 융합하면서 생기를 자극하는 충만감으로 나타났다.
이 충만감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 이수는 주머니 안에 있는 ‘고류큐’ 책을 꺼내 베고 맛있는 곰팡이가 되어버린 이하후유의 냄새를 큰 숨으로 빨아들였다.

이파(李波)...소설가.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연구소장, 일본 가나가와중소기업재단 선임연구원, 도키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콘텐츠개발업체인 (주)기업&미디어의 발행인.
이 소설은 지난 15년간 도쿄 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계속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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