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산에는 사전에 나오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를 모두 품고 있다. 봄 산은 꽃향기로 말하고 여름 산은 생기로 말하며 가을 산은 열매로 말하고 겨울 산은 침묵으로 말한다. 산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체를 선택하여 키우고, 스스로 뿌리를 내린 생명체를 세워주며, 생존에 불리한 쪽을 자연이치로 정리한다. 산은 수많은 장애물을 배치해 놓고 생존법을 지도하는 지붕 없는 생존 교장(敎場)이다. 가을 산은 능선과 계곡을 보여주고 뻗으면서 깊어지고, 겨울 산을 지키는 길짐승과 날짐승이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를 저장한다. 가을 산은 여름 산의 열정과 희생을 기억하고, 성장을 멈추고 현 여건에 맞는 열매를 재촉한다. 큰 나무들은 깊은 뿌리로 겨울바람을 버티고, 야생초는 겨울에 얼지 않도록 잔뿌리를 뻗는다. 가을 산이여! 자기능력만큼 사는 지혜를 깨우쳐서 씨종자가 걸러지는 가을 고비를 넘어가게 하시고, 버릴 것은 버려서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하게 하소서!

냉정.

산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거룩한 세계다. 산은 일정한 개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한 다툼과 경쟁을 시킨다. 약한 짐승이 살려면 강한 짐승보다 빨라야 하고, 도토리 알이 나무가 되려면 굴러서 큰 나무 밑을 벗어나야 한다. 산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냉철한 군주처럼 새로운 것을 위해 오래된 것을 정리한다. 가을 산은 단풍과 낙엽을 통해 땅속의 독소를 걸러내고, 가을 산은 아름다운 정경으로 인간의 오만함을 침묵시킨다. 산이 오름을 허락하기에 우리가 산을 오를 수 있다. 가을 산은 숫자의 질서를 보여준다. 하나의 큰 산이 낙엽을 떨어뜨리면서 둘의 도(道)를 보여주고, 나무가 땅과 하늘을 연결하면서 셋을 이야기 하고, 열매의 넋들을 위로하면서 넷을 말하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닫고 서면서 다섯을 말한다. 가을 산이여!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짐을 깨닫게 하시어 다가오는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냉정한 처신으로 하나뿐인 심신을 고귀하게 하소서!
한마음.

가을 산에는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 쓰러진 고목과 새순이 돋는 나무, 이름 모를 꽃과 칼돌 등 다양한 생명체와 무생물이 하나로 공존했었다. 숲을 자세히 보면 한 그루 한 그루 분리된 개체처럼 보이지만 더 자세하게 보면 한 뿌리로 연결된 생명 군락임을 알게 한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와 상수리는 이름과 겉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그 조상은 하나임을 일깨워 준다. 우직한 산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순리를 따르는 산은 산 기운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높은 산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높게 오른 자를 자랑스럽게 만든다. 경사지고 험한 산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서 산행을 하면 추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가을 산을 보면서 삶이 외롭고 덧없다 말하지 마라. 가을 산이여! 깊은 산은 깊은 메아리로 소통하고, 멀리 떨어진 산과 산은 애절한 메아리로 하나가 되며, 암반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야무지고 단단하게 산 자의 길을 가게 하소서!
박필규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198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1988년 '국방일보' 호국문예 수필 분야 당선, 2004년 중령으로 예편, 월간『시 사랑』을 통해서 등단, 2004년부터 작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과 군사학을 접목한 새로운 집필 영역 개척, 2014년 '군인을 위한 행복 이야기', 2013년 '버리면 행복한 것들' , 2012년 '군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2009년 '경제형 인간' , 2008년 '행동언어' , 2004년 '마주보기 사랑' 출판. 현재 파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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