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와 우타가 부대를 빠져나와 시내를 거쳐 오는데 나하의 소방대원과 복구요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의 행태를 의혹스럽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쟁 통에 근무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대낮에 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우타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흘 전 가잔비라에서처럼 이수의 오른팔을 가슴에 껴안고 얼굴로 이수의 팔을 짓이기다가 틈만 나면 발을 곧추세워 이수의 목에 신축성 있는 입술을 가져다대며 솔바람 같은 입김을 내쉬었다.

“이수씨, 우리 지금 어디로 갈까요?”
“우타가 원하는 대로...”
“이수씨, 저 아래 오키나와서적에 가볼래요? 아까 마쓰야마에서 내려다보니까, 시내건물이 모두 불타고 오키나와서적만 댕그랗게 남아있던데요.”
“불타지 않은 책이 혹시 남아있을까?”

찾아갈 목적지가 정해지자 두 사람의 걸음은 한결 바빠졌다. 두 사람은 우후조메 쪽으로 걸어내려 오며 보니까 며칠 전에 본 것보다 목조가옥들이 더 심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말 성한 가옥이 하나도 없었다.

현립병원의 뼈대도 무너졌고, 인근 학교들과 상가들도 벽만 남은 채 지붕이 사라진 상태였는데, 그래도 콘크리트건물인 오키나와서적만 외롭게 뼈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 오키나와 오모로마치.전쟁으로 불탄 뒤 미군부대가 되었다가 지금은 나하의 신도심이 되었다. 사진=이파>

우타가 이수의 손목을 잡아끌며 먼저 잿더미를 발로 밀치며 오키나와서적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이수는 혹시라도 불에 타지 않은 ‘식물관련 책’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점 안 서가들을 이리저리 바쁘게 훑었다.

그러나 1층 책장들은 다 무너지고 몇 권의 책들이 아직 ‘책’이란 형상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이수가 손을 가져다대자 푸석 먼지를 일으키며 한 뭉치의 재로 주저앉았다. 문학, 철학, 그리고 역사가 모두 한꺼번에 회색 잿더미 속으로 묻혀버렸다.

“전문서적은 2층에 있어요”

우타의 말에 이수는 반쯤 타버린 이층으로 가는 계단에 올라서자, 허술한 계단이 와락 무너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이 바람에 이수는 간신히 난간에 매달려 버티다가 몸을 흔들어 옆에 붙어있는 난간을 타고 겨우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아직 타다 남은 반쪽짜리 책들이 더러 남아 있어서 이수는 재를 뒤집어쓰며 아직 남아있는 책들 가운데 타지 않은 것들을 뒤져나갔지만, 식물 관련 책은 단 한권도 없었다.
이수는 낙망하며 서점 2층 바닥에 맥없이 드러눕자 반대편 계단으로 뒤따라 2층에 올라온 우타가 소리쳤다.

“이수씨, 이 책은 타지 않았네요?”

이수는 벌떡 일어서서 우타가 가리키는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판 보다 조금 큰 그 책은 서가넓이보다 작아 불길을 피해 아직 살아남아 있었다. 온전한 건 그 책 한 권뿐이었다.

그 책을 집어 표지에 묻은 재를 털어내고 펴보니 그건 오키나와 연구가 이하후유(伊波普猷)가 쓴 ‘고류큐(古琉球)’라는 책이었다. 이수는 허탈해졌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책 중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권의 책이 이미 이수가 닳도록 읽어본 책이었다.

< 이하후유의 고류큐...사진=이파>

그래도 그는 이 한권의 책에 묻은 재를 털어낸 뒤 윗옷 주머니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푹 쑤셔 넣었다.

“이수씨, 지금 그 책...전에 읽어본 거죠?”
“응, 옛날에 주머니에 오래 넣어 다녔지”
“그건 식물학 책이 아니잖아요...?”
“아...실은 내가 오키나와에 오기 전부터 ‘류큐’에 관심이 많았거든...”

“그래요?...그렇담, 우리 지금 당장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거기가 어딘데?”
“묻지 말고, 그냥 따라 오세요”

까만색 바지를 입은 우타는 청설모처럼 불탄 나하 시내를 재빠르게 팔짝 팔짝 뛰며 앞서 내달렸다.
빠르면서도 무용하듯 움직이는 우타의 뒷모습은 나흘 전 봤던 것과는 한참 달랐다.

그땐 고녀생 같았는데 오늘은 성숙하고 관능적이면서도 세련된 여인의 뒷모습이었다. 큰 키에다 걸을 때마다 옷 사이로 삐져나오는 그녀의 탄력성이 이수의 눈을 자꾸만 자극했다.

뒷모습이 더 관능적일 때도 있다......사진=이파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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