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25)...기적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입력 2017-10-13 09:31 수정 2017-10-14 22:44

다음날 아침, 이치카와 중대장이 이수를 호출했다. 이수가 중대장실로 들어서자 중대장은 이수의 눈길을 바라보지도 않고 얘기했다.

“이시타 조장, 어제 저녁 야마타 반장의 시신을 현립병원으로 옮겨 다시 부검을 했는데, 심장마비인 걸로 최종 판정이 났어. 멀쩡하던 녀석이 왜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 모르지만 일단 ‘전사’로 처리할 수 있게 서류를 작성해주게...”
“아, 예, 그러면...폭격 복구 작업에 전념하다가 과로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걸로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줘...좀 비뚤어진 녀석이지만, 그래도 남은 가족들을 위해 전사로 처리해줘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자네, 야마타가 죽였다는 군부 요시타(최만순)와는 아는 사이인가?”
“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였습니다.”
“아, 그래?...그럼 마음의 상처가 크겠네...오늘부터 내 허락 없이 군부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병사는 가차 없이 처벌하겠어. 이시타, 가혹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빠짐없이 보고해줘”
“예”
“이시타, 그런데...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야마타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킨 거지?...내 생각엔 요시타의 혼령이 억울함을 참지 못해, 야마타를 발작하게 해서 그놈을 저승으로 끌고 간 거 같아”

이수는 이치카와 중대장의 얘기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고,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리게 했으며, 얘기를 나누는 내내 등줄기에서 진땀이 흘렀다. 중대장이 자리를 뜨자 이수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우친 뿌리 하나를 꺼내 통째로 씹었다.

그 씁쓸하고 가식 없는, 그렇지만 형언하기 어려운 우친의 맛이 이수의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씩 가라앉혀주었다.

지금까지 이수는 그저 이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주저하고 망설였는데, 그럼에도 결국 적병을 찾아내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저격해버리는, 삶과 죽음을 스스로 가려낼 수밖에 없는 존재적 현장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 적병 한 놈을 저승으로 보냈으니, 이제 더 이상 그를 증오하진 말자’
이수는 적병의 죄 없는 가족을 위해 그를 선처해주기로 했다.

아직 도쿄에 살아있는 그의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야마타가 미군공습 이후 무너진 건물 틈바구니에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애쓰면서, 건물을 복구하는데 너무 과중하게 노력을 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전사했다는 보고서를 차근히 작성했다.

보고서를 다 작성한 이수는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이치카와 중대장실 앞으로 가서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문을 세차게 연 게 아닌데 폭격 때 부서져서 임시로 가설한 문짝이 약간의 힘만 줬는데도 활짝 열리며,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탁” 하고 울렸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이수는 이 문짝 소리에도 너무나 화들짝 놀랐다.

아, 그런데 기적이란 왜 이렇게 전혀 상상하지도 못할 순간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인가. 중대장실 문짝 소리처럼 예고도 징조도 없이 불쑥 나타난 기적은 이수를 공황에 빠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놀랍게도 이치카와 중대장 앞에 단정하게 간호복을 입은 우타가 등을 돌린 채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게 아닌가. 이치카와 중대장이 먼저 이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 이시타 조장, 마침 잘 왔네.”

이수는 중대장에게 경례 붙이지 것도 잊어버린 채 우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아직 이수를 바라보지 않다가 이치카와 중대장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수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이수는 깊은 동굴 안에서 잠자다가 갑작스런 빛에 들킨 박쥐처럼 몸이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듯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억지로 발에 힘을 줘 바로 섰는데도 온몸이 다시 가벼워지면서, 두발이 공중에 뜨는 듯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양손이 본래 위치에 붙어 있지 않은 것 같고, 얼굴엔 심한 열기가 솟아올랐다.

< 만남은 언제나 느닷없다. 사진=이파>

지난 며칠간 이수의 가슴속에서 부글대던 불안정의 거품들이 소용돌이를 치더니 그 거품이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어?, 이시타 조장,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네?”
“네, 지난번 가잔비라 고사포진지에서 만났습니다.”
“아, 그래?...이 사람이 그 간호사이구나. 그럼 잘됐네. 근데 우리 중대에 지금 부상병이 몇 명이나 있지?”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이 12명이고, 대부분이 찰과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치료약과 붕대는 충분한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치넨씨와 함께 하에바루 야전병원에 가서 의료품을 받아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카타 반장과 같이 갈 텐가?”
“아닙니다. 오늘은 저 혼자서 다녀오겠습니다.”
“음?, 그러면 내가 별도 외출증을 끊어주지. 하지만 24시간 안엔 꼭 돌아와야 한다. 가는 길에 시간이 되면 저번에 얘기했던 쌀을 대체할 식물을 조사하는 것도 잊지 말고... ”

이수는 상상하지도 못할 상황에서 24시간의 자유를 얻었다. 이처럼 이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건 우타가 잘 꾸며낸 전략 덕분이었다.

우타는 단지 이수를 면회하러 와선, 이수를 외출 나오게 하긴 어려울 거라고 보고 야전병원으로 가서 의료품을 함께 타 오는 계책을 마련한 거였다.

우타는 하에바루 야전병원 본부에 세키도쿠여학교에 있는 특설수상근무 103중대원들이 부상을 많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현재 의무반의 인력이 모자라 거기에 치료해주러 갈수 없으니까, 자신이 응급용 의료품을 챙겨가서 사태를 파악한 뒤 보고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오늘 우타가 가져온 붕대와 치료약은 103중대 부상자들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되었다.
우타와 함께 부대를 벗어나면서 드디어 이수는 깨달았다. 이치카와 중대장이 이수와 우타의 ‘관계’를 이미 눈치 채고, 사실상 그에게 24시간의 휴가를 과감하게 내 준 거라는 사실을.

야전병원까지 다녀오는 4시간을 제외하면, 이수에겐 지금부터 거의 20시간에 이르는 자유를 얻은 거였다. 더욱이 식물조사 활동은 이수에겐 자유보다 더 자유이니까.

언제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져서 죽을지 모르는 이 전장에서 20시간의 자유란 평화로운 시기의 ‘한 인생’과 맞먹는 시간일 테니까.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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