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 설악산에 취하다.<上>

입력 2017-10-11 08:56 수정 2017-10-11 09:34
(설악 종주 1일차, 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



산꾼들을 실은 버스가 구불구불 산모롱이를 힘겹게 돌아 올라 멈춰선 곳은 한계령. 오전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인데 한계령 주차장은 이미 형형색색 복장의 산꾼들로 초만원이다. 초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설악산의 가을단풍과 황금연휴가 잘 맞아떨어진 탓이다.




해발 1천 미터 고갯마루라 공기가 제법 찬데도 함께 한 산행 도반 J는 반팔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다. 휴게소 뒤로 경사가 심한 108개의 시멘트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배낭 무게를 잴 수 있도록 저울이 매달려 있다. 통과의례로 배낭을 고리에 걸었다. 10.5kg이다. 몸무게와 합산해 보니 장난 아니다. 대청봉 지나 공룡능선 거쳐 설악동까지 23km를 함께 해야할 물리적 무게는 무려..? 그러나 질량적 수치가 그러할 뿐, 감성적 무게만큼은 새털처럼 가볍다. 가뿐한 마음으로 배낭을 어깨에 다시 멨다.




탐방안내소 몇 걸음 전에 세워진 위령비가 궁금했다. 몇번의 설악산 종주 때마다 깜깜한 새벽에 이곳을 지나쳤기에 미처 보지 못했던 비석이다. 비석 뒷면에는 군인들 이름과 함께 군단장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산악인 위령비가 아니다. 1960년대 한계령 도로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사고로 숨진 공병대원을 기리는 비였던 것. 그런데 군단장 앞에 이름 석자는 지워져 있다.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군단장은 '김재규'였다. 얼추 짐작이 간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본격 숲 속으로 접어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온다. 가을햇살 머금은 단풍잎에 산꾼들 얼굴빛도 덩달아 붉게 물들었다. '빛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한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아낀 지베르니 정원이 이처럼 환상적이었을까? 핏빛 단풍잎을 투과한 빛이 조각조각 영롱하게 부서지며 찬란한 빛을 발하는 이곳 역시 환상적 산상 정원 그 자체가 아니던가. 파아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서 산상 정원을 끝없이 줄지어 걷는 산꾼들, 가을 설악을 수놓는 또하나의 풍경이다.




초입부터 된비알이라 몸뚱어리는 납덩이를 달아맨 듯 무겁게 쳐져 내린다.
가파른 오름길을 한시간 남짓 빡세게 올랐을까, 설악 珍景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한계령 삼거리(귀떼기청봉 갈림길)를 지나 서북능선에 올라서자 설악의 봉우리들이 앞다투어 흰이빨을 드러냈다. 삿갓 모양을 닮은 귀때기청봉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다가섰다.

별의별 산이름도 다 있다. 귀때기청봉(1,578m)도 그러하다. 귀때기청봉은 대청봉에서 서쪽 끝 안산으로 이어지는 서북주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얽힌 說은 이러하다.

옛날 옛적, 설악산 봉우리들이 높이 경쟁을 했다. 높이 순으로 대청, 중청, 소청, 끝청이 결정 되었는데 나중에 한 봉우리가 나타나 자기가 제일 높다고 박박 우기다가 귀때기를 맞고 지금의 장소로 쫓겨왔다. 그래서 '귀때기청봉'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황당무계하나 이러한 설이 있어 즐겁지 아니한가.




귀때기청봉 갈림길을 벗어나 끝청으로 향하는 서북능선은 이미 초겨울을 준비하는 듯 하다. 나뭇가지는 서둘러 잎을 털어내고 뒹구는 낙엽은 발밑에서 서걱거린다. 사시사철 변화는 이처럼 어김없고 또한 쉼없다.




해발 1,610m 끝청에 이르니 거친 설악 비경이 발아래로 짜릿하다. 바짝 다가선 중청과 대청봉, 용의 등뼈라는 공룡능선, 용의 어금니를 닮은 용아장성, 불교 최고의 성지라는 봉정암이 운해에 갇혔다가 드러나길 거듭한다. 시선 머무는 곳이 곧 선경이다.
끝청에서 1박이 예약된 중청대피소까지는 1km 남짓, 길은 완만한 편이나 예까지 오느라 다리심이 빠져 걸음 모양새가 너덜너덜하다. 중청봉은 군사시설이 있어서 일반 산객들은 출입 할 수 없다. 중청 산자락에서 건너다 본 대청봉 모습은 거대 피라밋을 연상케 한다. 정상을 향해 점점이 박혀 이동하는 산꾼들 모습이 역전의 용사들 같다.




시작점 한계령에서는 하늘이 높고 파랬었다. 끝청을 지나면서부터 은발을 풀어 헤친 듯 운무가 산자락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중청에 이르자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바뀌어 낮게 내려앉았다. 중청대피소에서 기상을 확인했다. 내일 오전부터 비가 시작될 거란다. 동행한 산우 J는 내일 걸어야 할 빗길 공룡능선을 걱정했다. J는 여러번 공룡능선을 목표로 올랐다가 기상이 나빠서, 컨디션이 나빠서... 여태 공룡을 접수하지 못했다며 이번만큼은 비가 쏟아지더라도 진행할 것이라 했다.
대피소 방 배정이 5시부터라 배낭을 내려두고 맨 몸으로 대청봉으로 향했다. 바람막이용 재킷을 챙겨 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대청봉 인증샷을 위한 줄서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번에도 줄서기는 포기다. 언저리에서 셀카봉 빼들고 있다가 정상석 앞이 비는 순간, 잽싸게 셔터를 눌러 2% 부족한 인증 컷을 건졌다. 대청봉에서 바라보는 설악운해가 혼자 보기 아쉬워 가족에게 영상 통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신통찮다. 대신 운무의 움직임을 짧은 영상에 담는 것으로 대신했다.




중청봉과 대청봉 사이 안부에 옴팍하게 자리한 중청대피소가 오늘따라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중청대피소는 설악산을 오른 산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렀을 것이다. 이처럼 산꾼들의 애환을 간직한 중청대피소가 건립 24년 만에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은 설악산 주능선인 대청봉과 중청봉 훼손이 가속화된다는 지적에 따라 중청대피소를 2019년까지 폐쇄하고, 능선 하부에 자리한 희운각대피소를 증축 리모델링해서 이용객을 흡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하 1층에 있는 목조 2층 침상 중 아래층을 배정 받았다.
여성들은 윗층에 배정됐지만 어찌됐건 남여가 한 공간이라 이래저래 불편할 수밖에. 햇반에 양념 불고기 그리고 소주 한 잔으로 석식을 끝낸 뒤 내일 새벽 02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서 소등시간인 9시 전에 일찌감치 침상에 몸뚱어리를 눕혔다.


< 下편으로 계속>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월간지(3종:월간 봉제기술/배관기술/플랜트기술)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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