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24)...너 같은 놈은 상관이 아니야

입력 2017-10-10 09:33 수정 2017-10-10 22:18


저녁 식사 때 마다 정시에 나타나서 5분 안에 식사를 끝내야 한다며 재촉해대던 야마타가 오늘따라 나타나지 않았다. ‘최만순 사건’ 때문에 헌병대에 끌려가서 호되게 심문을 받는 모양이었다. 서상덕은 하는 수 없이 오늘은 결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야마타 반장은 다른 날보다 10분정도 일찍 기상명령을 내렸다. 군부들이 정렬하자 야마타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외쳤다.

“어제 나를 헌병대에 찌른 놈이 누구냐. 요시타(최만순)는 군수품을 훔치다가 걸려서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그놈을 죽였다고? 그런 도둑놈은 죽어 마땅한 거야. 내가 오늘 네놈들 중에서 헌병에게 신고한 놈을 꼭 찾아내 요시타보다 더 혹독하게 처벌해 없애버릴 거다. 우리는 황군이다. 황군은 군령을 어긴 군부를 즉결할 수 있다. 알았나!”

한 차례 훈시를 끝내고 아침식사를 하러가는 야마타의 눈두덩이는 오늘 따라 움푹 파였고, 걸음걸이를 보니 왼쪽 다리를 무거워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약간 절었다. 아마 어제 저녁 최만순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로 본부 헌병대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면서 꽤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야마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보는 서상덕의 표정은 ‘오늘 아침을 넘길 수 없다’고 결정을 내린 게 확실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오늘 아침에 야마타 반장을 보내지 않으면 오늘 낮에 분풀이로 군부 한명을 또 죽이고 말리란 걸 직감한 것 같았다.

지난 10월10일 미군의 폭격 때 군량미 수만 부대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일본군이나 조선 군부나 모두가 밥이 아니라 죽으로 식사를 떼야 했는데, 단지 일본군에겐 백미죽을 주었고, 군부들에겐 현미죽을 주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현미죽이든 백미죽이든 모두 까맣게 불에 탄 쌀알이 뒤섞여 있어 죽맛이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서상덕은 이 씁쓸한 죽맛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믿었다.

그는 죽통 2개를 챙겨 야마타 반장과 나카타 반장이 앉아있는 식당 나무 탁자로 들고 가다가, 오른쪽 손바닥 속에 감춰놓은 이수가 건네준 미후쿠라기 농축 부스러기를 죽통에 슬쩍 털어 넣고 준비해둔 나무젓가락을 꺼내 담담하게 휘저었다. 그는 젓가락을 다시 뒷주머니에 넣고 야마타 반장 앞으로 가서 탁자위에 죽통을 탁 소리 나게 얹어놓았다. 그러자 야마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모리(서상덕), 너 나카타 반장이 상관인 거 몰라?”

서상덕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죽통이 바뀌면 모든 일이 ‘죽 쑤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야마타가 자기 앞에 놓인 죽통을 나카타에게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하지만 하늘이 도왔다. 나카타 반장이 “그냥 먼저 먹어”라며 죽통을 야마타 반장에게 도로 드밀었고, 다음 죽통을 나카타 앞에 올려놓자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죽통에 머리를 박았다. 후룩후룩 백미 죽을 급하게 먹던 야마타가 되돌아가는 서상덕을 다급히 불러 세웠다.

“이봐, 모리, 어제, 헌병대에 고자질한 놈이 너지?”

야마타는 찢어진 좁은 눈으로 살기를 띠며 서상덕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오만도 허기 앞엔 맥을 추지 못해서인지 야마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죽통 속으로 고개를 박더니 남은 죽을 소리 나게 삼키다가, 죽통을 통째로 들어 나머지 죽을 목구멍 속으로 주룩 쏟아 부었다.

< 야마타가 먹은 것과 같은 죽통. 뒷줄 오른쪽. 사진=오키나와 구해군사령부호에서 이파>

야마타의 식사속도를 보니 어젯밤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느라 저녁을 굶은 게 확실했다. 잠시 후 나카타가 먼저 일어서서 중대본부로 돌아가자, 야마타는 이제야 배속에서 안도감이 오는지 담배를 꺼내 느긋하게 빨아들인 다음 하늘로 연기를 쏴 올렸다.

한 5분 쯤 지났을 때 이수가 건네준 ‘미후쿠라기’의 효력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 야마타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의 배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저치고 의자에 몸을 뻗쳐 기댔다.

이때 서상덕이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쾅쾅 울리며 야마타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서상덕의 느닷없는 행동에 주변의 군부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곧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잔뜩 긴장한 채 서상덕과 야마타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봐, 야마타 반장, 사실 내가 어제 널 헌병대에 찔렀어.”
“뭐? 이 새끼 봐라. 상관에게 감히 말을 놓네?”
“야, 야마타, 너 같은 놈은 상관이 아니야!”
“뭐라고? 모리, 넌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그렇잖아도 오늘 한 놈 더 죽이려던 참인데, 몇 시간 더 살게 해줄 테니까, 가서 죽이나 처먹어”
“그래? 야마타, 너야말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내가 이 주먹으로 오늘 중에 너 대가리를 박살낼 거다.”

서상덕이 그 크고 억센 주먹을 야마타 반장의 코앞에 대차게 콱 내밀었다. 아마, 야마타 반장이 어제 헌병대에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권총을 뽑아 서상덕을 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헌병대에 다시 끌려가기 싫은지, 아니면 미쿠후라기 기운이 몸에 퍼져서인지, 그는 권총을 빼 서상덕의 머리로 향해 겨누더니, 방아쇠를 당기다 말고 “땅, 땅” 목소리로만 외치더니 권총을 도로 쑥 집어넣었다.

< 오키나와 미후쿠라기. 지금은 꽃이 피었지만 열매는 맹독성. '미훗과기'라고도 한다>

야마타 반장을 본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자기 숙소에 가서 잠시 쉬겠다던 야마타는 그 길로 이승을 떠났다. 11시쯤 103중대를 관리하는 헌병이 야마타가 죽은 걸 이치카와 중대장에게 보고하자, 중대장은 가까운 현립병원에 먼저 연락을 했다. 중대장은 혹시 타살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말썽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검까지 의뢰했다.

현립병원에서 나이든 의사가 급히 달려와 야마타의 시신을 약 15분정도 조사하더니 ‘심장마비’라고 결론지었다.
현립병원 의사가 ‘심장마비’라고 결론을 내리자 이치카와 중대장은 일단 가슴을 쓰러 내렸다. 타살 가능성이 발견되면 골치 아픈 일이 쌓이기 때문.

그럼에도 나카타 반장만큼은 현립병원 의사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뭔가 수상한 낌새가 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수가 내무반으로 돌아가는데, 나카타 반장이 이수를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와 옆을 스치며, 이수의 귓전에 콧김을 내뿜었다.
“이시타, 야마타를 죽인 게 너지?”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가상통화의 미래, 어떻게 생각하세요?

  • 현대판 튤립 투기이며 화폐로 인정받지 못할 것 745명 60%
  • 결제·지급 수단으로 인정받아 은행 대체할 것 506명 40%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