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23)...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자

입력 2017-09-29 09:08 수정 2017-10-07 20:22

우타가 면회 오기로 한 날, 이수는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군부들이 깨기 전 구모지가와 시냇물에 나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얼굴을 빡빡 문질러 세수를 한 뒤, 중대장실에만 있는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오늘, 우타가 분명히 찾아오겠지? 아니,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서 못 올지도 몰라.’

이수의 심정은 온종일 기대, 들뜸, 회의, 긴장으로 엇갈렸다. 이치카와 중대장이 미군의 대공습 이후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보급이 차단되었으니까 군량미를 보조할 식용식물이 있는지를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지만,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나하에서 식용가능 식물을 조사하려면 폭격을 맞지 않은 지역으로 나가서 조사해야 하지만 그동안 혹시 우타가 찾아올까봐 오늘은 기초자료부터 먼저 만들겠다고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하루 내내 한순간 한순간을 조마조마 하며 애를 태웠지만, 저녁 해가 줄지어 늘어선 구름을 벌겋게 불태우며 서쪽 바다로 침몰해 들어가는데도 우타는 나타나지 않았다.

폭격으로 새까맣게 탄 쌀알이 섞인 죽을 몇 숟갈 삼킨 뒤 하사관의 인원점검이 끝나자 임시로 마련한 포장막사의 땅바닥에 피곤한 몸을 느긋하게 눕혔지만, 다른 날과 달리 정신이 더욱 말똥해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영영 우타를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위기감이 드러누운 등바닥에 박힌 돌멩이처럼 몸을 욱신거리게 했다.
새벽 2시쯤 겨우 선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이수의 몸을 흔들었다. 서상덕이었다. 그는 허리를 무겁게 굽히더니, 입술을 이수의 귀에 가까이 대고 콧바람 소리를 세게 내며 속삭였다.

“형님, 최만순이 죽었심더...”
“뭐?..머라카노?”
“오후에 야마타 반장에게 끌려가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디지도록 얻어맞고, 의무반에 갔는데, 아까 죽었다캅니더”
“어째, 이런 일이...”
“형님, 제가 야마타를 그냥두면 큰 일 난다 안 캅디까. 요즘 형님은 중대본부에 가계시니까 잘 모르는데, 우리는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어차피 죽을 바엔 내가 먼저 저 야마타 반장 새끼를 죽여 버릴 깁니다. 저 새끼가 나카타 반장의 사주를 받아가, 우리 군부들을 차례로 죽이고 있거든예. 형님, 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야마타를 없애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아이소”
“섣불리 그런 짓 하지 마라”
“그러니까, 형님이 안 도와 주시면, 저 혼자서 합니다. 인자 총살당하는 거 하나도 겁 안 납니다.”
“알았다. 지금 너무 크게 떠들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까, 일단 눈 붙이고 내일 작업 나가서 구체적으로 의논하자”

서상덕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이수도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멍해졌다. 최만순은 어릴 때부터 심성이 올곧아, 이수의 어머니는 최만순을 꼭 ‘우리 만순이’라고 불렀다. 그런 만순이가 저런 망나니 야마타에게 맞아죽다니. 대체 만순이가 뭘 잘못했기에... 만순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해칠 사람이 결코 아니다...
‘우친사건’이 일어났던 날, 이수가 내무반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만순이’는 이수를 내무반 바닥에 엎어뜨린 뒤 배위에 올라타더니, 엉덩이로 배를 팍팍 누르다가 결국 이수의 얼굴에 주룩 눈물을 쏟았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만순이의 눈물을 제대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수는 분명히 최만순에게 어깨를 두드려주며 “살아서 함께 돌아가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렇게 그에게 약속했는데 그가 몰매를 맞고 죽어가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온종일 ‘여자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이수는 자책과 자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데, 만순이가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지금 내가 여기 드러누워 자책만 하고 있어야 하나. 야마타 반장은 이 흉포한 전쟁터에서 적군이 아닌 순수한 우리의 군부 최만순을 죽였다. 죄 없는 아군을 죽인 군인은 명백한 적군이다. 이런 전쟁터에서 적군은 사살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야마타를 헌병대에 공식적으로 고발해 군법으로 그를 처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려다가 오히려 야마타로부터 교묘하게 역습당해 이수를 비롯한 관련 군부들 여러 명이 총살당할 게 뻔했다.
더욱이 미군 폭격이후 일부 일본인들은 피해의식을 떨치지 못해 류큐인과 조선인에게 더 악독하게 대하고, 미군에게 해야 할 분풀이를 류큐인과 조선인에게 해댔다. 더욱이 일본군은 류큐인과 조선인 가운데 누군가가 오키나와 군사기지 정보를 미군에 빼돌렸다며 발광을 하더니, 결국 영어를 할 줄 아는 류큐인과 조선인 이민자들을 색출해내 그 가족까지 몰살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꾹 참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냥 버텨야 하나?...그러다간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야마타를 죽이지 않을 순 없다. 서상덕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놈을 없애버리겠다고 했는데...그의 얘기가 옳은 것 같다. 이런 전쟁터에서 곡괭이 자루로 죄 없는 사람을 때려죽인 놈을 처치해버리지 못한다면 이건 인륜과 천륜에 역행하는 일일 것이다...’

날이 밝아오기 전 이수는 서상덕의 얘기처럼 야마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런 일은 아무도 모르게 수행하는 게 상책. 그는 배낭에서 우타의 고모네 집에서 얻어온 오키나와 협죽도(Cerbera manghas)인 ‘미후쿠라기’의 열매와 폭파된 설탕공장 앞을 지나며 입수해온 설탕 2그램 정도를 꺼내 기름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내무반을 빠져나와 소리 나지 않게 가설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미후쿠라기’는 아주 적은 양을 먹어도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하는 극 독성 열매인데, 그는 화장실에 앉아 이 협죽도 열매들을 나무막대기로 짓이긴 다음, 설탕을 조금 꺼내 섞어 버무렸다. 이를 다시 기름종이에 사서 작업복 윗주머니에 넣고 살쾡이 걸음으로 내무반으로 되돌아와 땅바닥에 급히 드러누웠다.
날이 밝았다. 제 103중대 대원들은 나하 시내 거리를 보수하고 파괴된 거리와 대피호를 복구하는데 동원되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이치카와 중대장이 식용식물 조사 외엔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아서 이수도 일단 군부들의 복구 작업에 따라 나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땅만 내려다보며, 거리에 흩어져 있는 벽돌부스러기를 열심히 치웠다.

< 오키나와 구름은 사연이 참 많아 보인다. 사진=오늘, 오키나와현립미술관 앞에서 찍었다.>

서너 시간 지나자 군부들의 작업반경이 넓어지면서 일본군 하사관들의 태도도 느슨해졌다. 또 감시하던 일본군 병사들이 불탄 설탕공장에서 설탕이 녹아 흘러나와 굳어버린 사탕막대기를 칼로 조각내 서로 나눠먹기 경쟁을 벌이느라 군부들의 행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히가시초까지 왔을 때 이수가 서상덕에게 손짓을 한 뒤 아직 주인이 귀가하지 않은 개인가옥 방공호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서상덕도 감시병의 눈길을 피해 이수가 먼저 들어간 방공호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문을 닫아버리자 벙커 안은 두 사람의 음성이 절대 밖으로 새나갈 수 없는 완벽한 폐쇄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수가 성냥을 꺼내 호안에 마련해놓은 비상용 석유등에 불을 붙이자, 서상덕이 참고 또 참았던 울분을 큰소리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형님, 저 야마타 반장 놈이 벌써 조선인군부를 4명이나 죽였심더. 저 새끼는 인간이 아닙니다. 살인맙니다. 어제는 저 새끼가 중대보급품을 몰래 빼돌려놓고는 상관에게 들킬까봐 최만순한테 덮어씌운 깁니다. 제가 그 개새끼를 칼로 콱 찔러 죽여뿔랍니다”
“그래, 알았다. 야마타 그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자.”
이번엔 이수가 솟아오르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해 관자노리를 불끈거리더니, 높은 코 양쪽에 푹 파인 눈매에서 번쩍이는 광기를 내뿜었다.
“상덕아, 이거 아무한테도 말 하지마라. 우리 둘이서 그놈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자.”
“그럴라카면 우째야 됩니까?”
이수는 윗주머니에서 미후쿠라기가 들어있는 기름종이 접이를 조심해서 꺼내 서상덕에게 내밀었다.
“자네, 오늘 저녁 식사배달 당번이지?”
“예”
“오늘 저녁에 야마타에게 배달되는 죽통에 아무도 모르게 이 기름종이 안에 든 부스러기를 털어 넣어라”
“형님, 이거 독약입니까?”
“아니다. 독약이면 자네가 금방 발각되지. 근데 이 열매부스러기는 먹어도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아. 이걸 먹고 난 뒤 3시간정도 지나면 심장마비로 죽게 되지. 나중에 부검을 하더라도 독약이 발견되지 않아.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 열매가루를 정확하게 야마타의 죽통에 털어넣어 젓기만 하면 된다.”
“그거야, 걱정 하지 마이소. 그런데 독약이 어째서 금방 안 죽고 한참 뒤에 죽습니까?”
“아, 이거 말이야, 미후쿠라기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건데 여기엔 특수한 물질이 들어있거든. 이 물질은 처음엔 맥박을 천천히 뛰게 하다가, 결국 심장을 멈추게 해. 청산가리 같은 독약은 먹자마자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하잖아. 이거는 그렇지 않아. 먹고 난 직후엔 별 증세가 없지만 나중에 몇 번 윽윽 거리며 토하다가 그냥 심장이 멎어버려”
“그래예?...예, 잘 알겠심더”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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