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22)...일본은 망한다.

입력 2017-09-20 14:50 수정 2017-10-10 22:22


먼저 돌아온 동료 군부들이 운동장 중앙에 군용천막을 세웠지만 100여명 의 군부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끼리 서성거리고 있었으며, 아직까지 귀대하지 않은 인원이 태반이었다.

이수가 돌아오자 내무반 우두머리인 서상덕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수를 향해 걸어오자 군부들이 우르르 서상득을 뒤따라오더니, 이수를 둘러쌌다. 서상덕이 그 두터운 입술에 힘을 주며 이수에게 물었다.

“형님, 우리 인자 우째되는 겁니까?”

이수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서상덕의 부리부리한 눈을 파고들며 바라보다가 그의 크고 넓은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수와 서상덕을 둘러싼 군부들의 눈빛을 보니 이수가 가잔비라에 다녀오는 사이, 최만순과 서상덕이 이수에 대한 신상을 동료 군부들에게 모두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이수가 끌어안았던 서상덕의 어깨를 풀어주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 지금, 와촌면에서 온 군부 5명의 시체를 수습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저 뒤쪽 사탕수수밭으로 도망가다가 미군의 기총소사를 당했는데, 정말 처참합디다.”
“그래?...아...정말, 고생 많았다”
“형님, 우리도 언제 그렇게 죽을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아니지, 절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이때 마침 이치카와 중대장이 폭격당한 본부를 복구하기 위한 대책마련을 위해 일본인 장교 및 병사 전원을 중대장실로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실만 폭격을 당하지 않아 일본군들은 모두 그곳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모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이수는 서상덕에게 군부 전체를 오른쪽 임시 천막 아래로 모이게 하라고 얘기했다.

서상덕이 천막 중앙으로 가서 우렁찬 음성으로 “전원 집합”이라고 소리치자, 조선인 군부들은 이수와 서상덕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이수는 말을 꺼내기 전, 차근하고 침착하게 동료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그동안 신분을 노출하기 싫어 동료들과 얘기도 거의 나누지 않았고, 자괴감에 심하게 빠져 작업 중에도 동료들과 말 걸기를 꺼려했는데, 오늘 눈여겨보니 오키나와에 오기 전부터 알던 후배들이 꽤 눈에 들어왔다.

율하동의 최봉래, 내곡동의 김수만, 용계동의 신길순, 동내동의 황말조, 괴전동의 권태술, 금강동의 신길순, 상매동의 이종락 같은 후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이수가 누구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수가 눈길을 지독하게 외면하는 바람에 말도 걸지 못했던 터였다.

이수는 오키나와에 끌려온 전체 조선인 군부들보다 나이가 서너 살 정도 많았다. 다른 군부들은 18~20세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어물시장에서 생선을 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오키나와 나하까지 끌려와 군수품 하역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오늘 더욱 허탈해 하는 건, 지난여름 그 무더위에 모기에게 물어 뜯겨 가며, 진흙 속에 미끄러지고 또 엎어지며, 피땀 흘려 옮겨 놓은 대포, 기름드럼통, 군복, 쌀, 총알 등 모든 물품이, 어제 하루 미군기의 폭격으로 모두 부셔지고 찢겨지고 박살나버리는 바람에 그 허탈감을 이겨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일본군에 충성할 생각은 손톱 끝만큼도 없지만 그동안의 노동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실감에 정신이 멍해져 있었다.

더욱이 군부들은 아직도 갑자기 하늘에서 폭탄과 총알이 우수수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하늘을 쳐다보는 걸 두려워하는 눈치였고, 모두가 고개 푹 숙인 채 손가락을 가늘게 떨었다.

조선군부들은 일본군이 자신들을 구박했지만, 그래도 일본이 이른바 ‘귀축미영’들 보다는 더 근대화되어 있어 미군들보다는 우세할 줄 알았는데, 어제의 상황은 그동안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도쿄역.     사진=이파>

“자, 여러분, 오늘 저는 중대 조장이 아니라, 나이 몇 살 더 많은 고향 선배로서 얘기합니다. 일단, 우리 너무 겁내지 맙시다. 지금 겁을 먹은 사람들은 저기 중대장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일본군인들입니다. 확실히 말해 우리는 ‘황군’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황군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영광스럽게 죽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는 이 전쟁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꼭 살아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 같은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지’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를 ‘동지’라고 부릅시다.

자, 오늘부터 우리의 암호는 ‘동지’입니다. 일본사람들은 ‘동지’를 발음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돈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끼리 통해야 할 때는 동지라고 부릅시다.그리고, 지금부터 우리의 군가는 ‘아리랑’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아리랑을 발음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리랑을 제대로 부를 줄 알면 조선 사람입니다.

저 일본군에게 절대 얘기해서는 안 되는 극비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얘기를 일본군에게 전하면 우리 모두 총살당합니다.지금 대동아 전선에서 황군은 미군에게 계속 몰살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미군들이 오키나와로 밀려 올 겁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미군이 몰려오면 우리를 지켜줄 사람은 황군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 동지들끼리 함께 뭉쳐 살길을 찾읍시다.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시간 뒤 먼저 간 와촌면 동지들의 장례를 치러줍시다. 이 천막 아래 다시 모여 장례식을 올립시다.

거듭 얘기하는데,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서로서로 도와야만 합니다. 혼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또 도와줘야 할 때 서로 ‘동지’를 찾으십시오. 자아, 여러분 제가 먼저 동지라고 소리치면 모두 함께 동지라고 외칩시다.”

이수가 먼저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하늘로 팔을 뻗치며 소리쳤다.

“동지-!”
“동지-!”

그의 짧은 연설은 조선인 군부 동지들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모두가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아오던 ‘농민’이나 ‘상인’이었던 사람들이 일본군에 끌려와 느닷없이 ‘바카야로’로 전락했는데, 그의 연설이 이 사나이들을 ‘노예’에서 ‘동지’로 승격시켜 인간적 존엄을 되찾게 해주었다.
이수는 오직 ‘동지’라는 이름을 달아주었을 뿐이지만 ‘동지’의 효력이 놀라울 정도로 금방 나타났다. 서상덕이 다시 동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동지 여러분, 저 일본군의 회의가 끝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불탄 부대건물을 정리합시다.”

그의 음성이 떨어지자 조선인 군부들은 삽과 괭이를 챙겨 빠른 걸음으로 어제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 쪽으로 몰려갔다. 군부들은 이치카와 중대장이 명령을 내릴 때보다 더 신속하게 움직이며, 불탄 나무는 나무대로 재사용이 가능한 벽돌은 벽돌대로 선별하면서 청소를 하기 시작해 막사를 지을 공간을 확보해나갔다. 그 사이 서상덕이 이수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님, 야마타 반장 알지예?”
“음, 왜?”
“그 새끼가 우리 조선군부들을 너무 심하게 괴롭힙니다. 형님이 좀 막아주이소.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음...알았다”

이때 어제 미군의 기총소사를 피해 도망가다 절친한 동네친구들을 모두 잃은 와촌면 동강동에서온 신태영이 불탄 나무 등걸을 옮기면서 이를 악물고 신음하듯 콧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흥얼거림은 ‘아리랑’이었다.

처음엔 그의 노래가 그저 읊조림처럼 들렸는데 그가 울먹이며 조금씩 목청을 높이자, 군부들은 불탄 폐자재를 한자리로 모으면서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노래를 제대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누르지 못해 훌쩍거리거나 꺽꺽 울었다. 하지만, 작업속도를 늦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지들의 눈물이 비스듬히 비추는 초가을 햇빛에 반짝이다 바닥으로 떨어져 아직 연기가닥을 풀어내는 숯덩이들을 푸싯 푸싯 적셔나갔다.
이수는 서상덕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나이도 아리랑을 부르자 눈물이 입술까지 타고 내려와 눈물 머금은 입술 속의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부들에게 오늘의 눈물은 ‘한탄’이 아니라 ‘각오’였으며, 이 눈물은 짓눌렸던 자존심을 의연하게 회복하는 당김 줄이 되었다.
이수는 지금까지 ‘눈물의 냄새’가 이렇게 진한 줄은 정말 몰랐다. 군부들이 흘리는 눈물냄새는 어떤 꽃향기보다 더 찡하게 코를 자극하더니 가슴 속을 할퀴었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를 계속 찾아가 현지에서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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