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21)...배신감을 극복하는 방법

입력 2017-09-19 11:39 수정 2017-09-19 15:02


우타는 나하항의 다른 이름이 ‘꽃바람항구(花風港)’라고 했다. 그건 류큐의 전통무용 무토 하나후라 부시(本花風節)에서 비롯되었단다. 이수는 북쪽 메이지다리를 건너면서, 젊은 여인이 떠나가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는 미이구수쿠(三重城) 쪽을 바라보았다.

꽃냄새 섞인 바람을 맞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그 화풍항에는 지금은 부서진 군함과 수송선의 시커먼 잔해와 부유물들만 떼를 지어 몰러 다녔고, 그토록 파랗던 물빛은 짙은 회색의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꽃바람 항구가 불바람항구(火風港)’변하더니, 바다에는 타다 남은 시커먼 숯덩이 조각들만 물결 따라 흔들렸다.


<가잔비라에서 내려다 본 옛 꽃바람항구.    사진=이파>

돈도초를 지나 나하 시내에 들어서자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잔해들 속에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비틀었다. 남다르게 향기와 냄새를 잘 맡는 이수의 후각이 오늘은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우후조메에 들어섰을 땐 기름타는 냄새, 가옥 타는 냄새, 양곡 타는 냄새, 재 날리는 냄새, 길바닥에 말라붙은 피 냄새 등이 뒤섞인 기이한 냄새가 이수의 후각기능을 서서히 망가트렸다. 거리에서 파손된 건물과 거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쓰러진 전봇대와 전선, 흩어진 폐자재들 때문에 부대로 돌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정지-!”

이수가 세키도쿠고등여학교에 있는 부대로 들어가려 하자, 정문의 초병이 이수를 불러 세웠다. 그 초병은 큰소리로 헌병을 불렀다. 그러자 열흘 전 이수의 가방을 뒤져 우친을 찾아냈던 그 헌병이 후닥닥 뛰어와 이수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우친 바구니를 낚아채 풀어보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 자식 이거, 구제불능이구만...이제 우친을 자루 째 훔쳐왔네...”

헌병은 이수의 양 팔을 세게 꺾더니 팔목에 급히 수갑을 채웠다.

“넌 탈영병으로 신고 되어 있어. 미군기의 폭격과 동시에 근무지를 이탈한 것으로 신고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이수는 그때서야 나카타 반장을 생각해냈다. 나카타 반장은 그 기총소사 속에서도 죽진 않은 모양이다. 이수를 탈영병으로 신고할 사람은 나카타 밖에 없었을 테니까.

수갑을 찬 채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이치카와 중대장이 초병소로 들어왔다. 중대장은 본부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헌병들에게 얘기하며, 이수 쪽을 힐끗 쳐다봤다. 중대장이 이수를 쳐다보는 눈길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 냉랭했다.

“이시타 조장은 왜 또 잡아둔 거야”

“니카타 반장이 탈영으로 신고해왔습니다”

“이시타 조장의 근무지가 어딘데?”

“가잔비라라고 들었습니다”

이치가와 중대장이 눈에 힘을 주며 이수를 다시 한 번 노려보았다.

“이시타 조장, 어제 가잔비라에 갔었어?”

“예, 중대장님”

“누구와 함께 갔어”

“저 혼자 갔습니다”

“나카타 반장은?”

“폭격이 시작된 뒤 우후조메 입구에서 헤어졌습니다”

“헤어지다니?”

“와카사 방향으로 달려 가버렸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근무지를 이탈한 건 나카타로구만...”

“......”

“이시타, 근데 자네가 가잔비라에 갔다는 걸 입증할 수 있어?”

“예, 어제 저녁 가잔비라 언덕에서 해상정진 2전대 1중대장 오시타 소위를 만났습니다.”

“오시타를 만났다고?”

“네”

“오늘 회의에서 오시타 소위를 봤는데, 자네 얘기를 전혀 하지 않던데?”

이수는 말문이 막혔다. 배신감이 머리끝에서 온몸으로 타고 내려왔다. 나카타만 배신을 한 줄 알았더니, 오시타까지 등을 돌리다니. 어제 저녁 부러진 팔을 치료해주고, 오늘 새벽까지 함께 전황보고서를 작성해주었으며, 이치카와 중대장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했던 오시타 소위가 이치가와 중대장에게 이수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 모멸감이 확 밀려왔다.

이수는 일본에선 배신하는 사람에게 양보를 하면 더욱 해를 끼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서 배신감은 그냥 참고 견딜 게 아니라 단호하게 사실을 공개하는 게 최선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도쿄제국대학의 연구실에서도 그러했다. 교수가운데는 연구원들이 죽도록 실험해놓은 연구결과를 마치 자기가 다 한 것처럼 논문에 발표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럴 때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간 오히려 더 심한 배신을 당하는 연구원들을 여럿 봤다.

그래서 ‘그 따위 이기적인 장교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한다’고 마음먹고 변명할 건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대장님, 오늘 오시타 소위가 오른 팔을 다친 거 보셨죠?”

“응?, 그래”

“오시타 소위의 붕대는 제가 어제 메고 갔던 보급품상자에 들어있던 겁니다. 처치는 가잔비라 언덕에 지원 나온 간호사가 해준 겁니다.”

“그래?”

“그리고, 오늘 회의에서 오시타 소위가 전황보고를 했죠?”

“음, 보고를 잘해서 수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지...”

“그것도 오늘 새벽까지 제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오른쪽 팔을 다친 오시타 소위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보고서를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하...오시타, 그 친구 의외로 욕심이 많군. 하긴 육사 57기로 올해 4월에 갓 졸업했으니까, 의욕이 하늘을 찌르겠지...”

이치카와 중대장은 헌병에게 빨리 이수의 수갑을 풀어주라고 명령한 뒤, 힘주어 말했다.

“진짜 이탈자는 니카타 반장이다!”

이수는 헌병이 수갑을 풀어주자 이치카와 중대장이 더 이상 묻지 않는데도 문간에서 뒤따라가며 거듭 변명을 이어갔다.

“중대장님, 저는 어제 저녁 미군의 공습이 끝난 뒤 팔 다친 오시타 소위를 야마시타에 있는 간호사의 고모 집으로 모시고 가서, 새벽까지 전황보고서를 작성해주고, 눈을 조금 붙인 뒤 우친 한 보따리를 얻어 지금 귀대했습니다.”

중대장은 이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초병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헌병, 그 우친을 이시타 조장에게 돌려주고, 나카타 반장이 들어오면 나한테 데려와!”

이치카와 중대장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이수는 수갑 찼던 손목을 주무르며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온 이수는 눈앞에 펼쳐진 사태가 믿겨지지 않았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수상근무 103중대 내무반 건물이 미군폭격에 폭삭 내려앉았고, 부서져 검게 그을린 나무기둥과 벽돌과 기왓장들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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