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18)...매끈한 분홍빛 피부

입력 2017-09-05 14:35 수정 2017-09-21 00:04


매끈한 분홍빛 피부를 가진 ‘기지무나’가 초록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언덕 아래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물 속으로 눈을 고정한 채 들여다보았다. 진초록 나뭇잎, 새파란 바다, 그리고 빛나는 분홍빛 피부가 바람에 섞여 감각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한쪽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오키나와에 사는 귀여운 정령인 기지무나의 머리칼은 작품을 그리는 붓처럼 바람을 따라 물결쳤다.기지무나는 갑자기 몸을 뻗어 파란 바닷물 속으로 유연하게 뛰어들었다. 파란 바다와 기지무나의 분홍빛 피부는 서로 대조를 이루며 이수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첫 번째 파도가 밀려오자 매끈한 몸매의 기지무나가 물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세찬 휘파람을 내뱉더니 다시 물밑으로 깊이 내려갔다. 어느 사이 기지무나는 분홍색 물고기로 변신을 해서 산호초 사이를 유연하게 헤엄쳐 다녔다.짙은 파란색이 더 푸르러져 새까맣게 된 눈동자를 가진 분홍 물고기는 이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방긋 웃었다. 분홍물고기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자 물결 틈 사이로 높이 치솟더니 누워있는 이수의 얼굴 위로 확 뛰어내렸다.

이수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뛰어내린 분홍물고기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이수의 눈앞에 맑은 얼굴의 우타가 방긋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는 조금 전 꿈에서 본 분홍빛 물고기의 눈동자처럼 웃음 끼로 가득했다.

“이수씨, 뭐 찾으세요?”

“응? 분홍색 물고기가...”

“분홍 물고기?...하하하...조리구와요가 꿈에 나타났구나!”

“그게 조리구와요야?”

“네, 본토에선 꽃붕어라고도 하죠. 나중에 자마미에 있는 바다꽃 정원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오키나와 바다를 헤엄치는 분홍 물고기...조리구와요

 

우타의 단발머리 위에 밝은 햇살이 부서지는 걸로 봐서 이미 해가 뜬 지 오래되었고, 바깥에서 새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걸 보면 더 이상 미군의 폭격은 없는 것 같았다. 이수는 그녀의 팽팽한 볼을 입술로 느끼고 싶어 누운 채 팔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끌어 잡아당겼다.

“이수씨는 어쩜 피부가 이렇게 하얘요? 햇볕에 익은 자리는 완전 분홍빛이에요”

“우타의 피부처럼 매끈한 분홍빛이 아니고...썩어 들어가는 붉은 빛이지”

“그렇지 않아요. 이수씨의 피부는 기지무나보다 더 매끈해요”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타가 챙겨놓은 군복을 다시 입었다.

“...우타, 근데, 고모님은 어디 가셨지?”

“아, 고모는 아침 일찍 저 건너편 덴토잔에 있는 오키노구라(沖宮)에 기도하러 갔어요. 이수씨, 내가 아침차려 오는 동안 우물터에 가서 세수하세요.”

우타가 부엌으로 나가자 이수도 벌떡 일어나 우물터로 나갔다. 우물터엔 이미 우타가 커다란 나무물통에 세숫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앞마당엔 물오리 두 마리가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집 앞 돌담 모퉁이엔 50년 이상 된 걸로 보이는 가쥬마루 두 그루가 서로 엉킨 채 서있고, 그 나무의 짙은 초록색 잎사귀엔 햇살이 강하게 떨어져 물방울 튀기듯 반짝거렸다. 올해 오키나와엔 가뭄이 심했는데도 이 가쥬마루는 가지에서 끈 모양의 뿌리를 여러 개 늘어뜨려, 그 뿌리(氣根)을 바람에 나부끼게 하면서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한 덕분에 싱싱한 기운을 발산했다.

이수는 우물터에서 찬물에 발을 담근 뒤 비누로 세수를 하고, 머리도 감았다. 오키나와에 와서 비누로 씻어보긴 처음이었다. 내친 김에 옷을 벗고 온몸에 비누칠을 한 다음 찬물을 끼어 얹었다.나하 항구 쪽에선 아직 잔연기가 솟아오르고, 타들어가는 탄약고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지만 이곳 야마시타엔 완전히 평화로움을 회복하고 있었다. 다시 옷을 집어 입자 우타가 수건을 들고 나와 이수에게 건네주었다.

“이수씨, 여긴 나하 시내랑 물이 다르죠? 여기 물은 저기 산기슭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홈통으로 내려 받은 물이예요. 그 우물을 우틴다(落平)이라고 해요.”

“아하, 그래서 물이 이렇게 미끄럽구나.”

실제 나하 시내에 공급되는 물은 짜서 세수를 하고나면 피부가 거칠어지는데 소금기가 전혀 없는 야마시타의 우틴다 물은 목욕을 하고나자 피부가 매끈해졌고, 피부의 개운함이 몸속으로 깊게 스며들어왔다.

‘아, 어제 귀갑묘에서 우타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생기, 이런 온화함, 이런 평화, 그리고 이런 자유로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생기를 또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우타와 함께 있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이 전쟁은 그걸 허용해주지 않을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수는 다시 이런 여유를 얻을 수 있을까? 사진=이파

 

우타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안채로 들어서는데 통로엔 갖가지 미조키(民具)들이 걸려있었다. 하마라는 낫을 비롯, 마로 잘 짠 망태인 안디라, 대나무 망태인 바키 등이 가지런히 걸려있고, 반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여자들이 물통이나 짐을 머리에 일 때 머리위에 얹는 똬리인 간지나도 여러 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이수는 안방에 다시 들어서서야 지난밤 자고 일어난 안방의 바닥이 온돌방이 아니란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나무 마루였다. 어제 저녁, 이 나무 마루에 종이를 펼쳐놓고 ‘전황보고서’를 작성했으면서도 오시타 소위가 재촉하는 바람에 이게 마루란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냥 온돌방인줄로만 알았다.

류큐엔 겨울에도 춥지 않으니까 온돌방을 만들지 않고 대신 방 모퉁이에 숯불을 지필 수 있는 사각형 바닥의 작은 공간을 두고 있었다. 천정에서 거기로 줄을 내려 주전자를 건 뒤 화취죽(火吹竹)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쉽게 피울 수 있게 해놓았다. 이 곳은 차나 술을 데워 마시는 공간인 듯했다.

이수는 어둑한 안방 윗목을 바라보다가 후다닥 놀랐다. 그곳엔 잘 짜진 둥근 대바구니에 울퉁불퉁한 우친 뿌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끼우친이었다. 그 옆엔 우친을 얇게 썰어 펼쳐놓은 대바구니도 하나 더 있었다.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이 샛노란 우친 박편에 코를 박고 비릿한 냄새에 빠져들었다. 근데 기이하고 자극적인 향기는 화약 냄새, 피 냄새, 재 냄새, 시체냄새들과 섞여 또 다시 불안한 냄새를 불러왔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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